메뉴 건너뛰기

close

색소포너, 발레리나 마리오네트. 김종구 선생 부부를 보는 듯 하다.
색소포너, 발레리나 마리오네트. 김종구 선생 부부를 보는 듯 하다. ⓒ 인형극단 보물
색소폰을 든 목각인형이 또각또각 걸어 나오며 신나는 음악을 연주한다. 덥수룩한 턱수염과 꽁지머리가 낯익은 모습이다. 무대에 오른 목각인형은 정열적으로 온몸을 비틀면서 색소폰 연주를 한다.

마음에 드는 관객에게는 윙크를 보내기도 하고 때론 눈썹을 꿈틀거리며 진지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무대를 한바퀴 돌면서 객석을 바라보고는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행복하세요?"

마리오네트 인형극이 벌어지는 소극장 무대. 객석과 불과 1미터 남짓한 거리를 두고 목각 인형이 줄에 매달려 갖가지 묘기를 연출한다. 국내에는 유일무이하다싶은 정통 마리오네트 연기자인 김종구(50·인형극단 보물 대표) 선생의 손끝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손끝의 부지런함은 인형의 생명력과 직결된다. 빠르되 정교하고 크게 움직이되 섬세한 장인(匠人)의 손길이 묘한 긴장감을 준다. 수십 갈래의 줄이 인형의 팔, 다리, 어깨, 관절은 물론 눈썹, 눈동자, 수염 심지어 볼살까지 연결돼 있다. 미세한 표정연기를 잡아내기 위해서다.

그러고 보니 그도 덥수룩한 수염에 꽁지머리를 하고 있다. 색소폰 목각인형은 그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인형에 매달린 줄을 거슬러 그의 손끝으로 시선이 도달하자 부자연스러운 손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왼손 엄지손가락 마디 하나를 인형 만드는데 바쳤다.
왼손 엄지손가락 마디 하나를 인형 만드는데 바쳤다. ⓒ 유성호
그는 왼손 엄지손가락 한 마디가 없다. 목각인형을 만들다가 전기톱에 두 번이나 베이고 절단됐기 때문이다. 잘린 손가락을 목장갑으로 칭칭 동여매고는 억지로 한 손으로 운전해서 병원에 갔는데, 결과적으로 접합에는 실패하고 신경마저 무뎌졌다.

그래도 그는 감사하고 행복하단다. 천직으로 생각하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루 세 차례 강행군 공연을 마친 그를 현충일인 6월 6일에 극장 객석에서 만났다. 힘들만도 한데 그는 시종 천진스런 눈망울과 미소를 머금고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갔다.

- 엄지손가락은 어떻게 다쳤나?
김종구 선생과 부인 송옥연씨.
김종구 선생과 부인 송옥연씨. ⓒ 유성호
"2002년 말과 2003년 초에 같은 곳을 두 번 다쳤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상처가 컸다. 태풍으로 쓰러진 은행나무를 자르는 과정에서 톱날이 튕기면서 손톱 밑을 파고들었다. 의사 말로는 접합해서 사용 가능하다고 했는데, 붕대를 풀고 보니 마디 하나가 없었다. 주위에서는 그만 두라는 의미가 아니냐며 미신을 앞세우며 다그쳤다. 그러나 이 일을 워낙 좋아하고 천직으로 여겼기 때문에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손목만 남았더라도 계속 마리오네트를 조작했을 것이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생활하거나 연기하는데 지장이 없다."

- 마리오네트를 배우게 된 동기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인테리어 회사에 들어가 주로 대형 주점 실내장식을 하면서 일과 관련한 술자리 등 방탕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신앙을 접하면서 인생의 목표를 바꾸게 됐다. 교회 주일학교 선생 때 교사강습회에 참석해 손 인형 공연을 봤다. 불현듯 감동이 몰려와 '하나님 제가 저것을 하겠습니다'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때부터 인형극에 빠졌다. 한 해는 일본 이이다(飯田)시에서 열리는 인형극제를 보러 갔다가 미국 팀의 마리오네트 공연을 접했다. 인형의 섬세한 움직임을 보고 한 마디로 감동했다. 한국에 돌아와 배우고자 수소문을 했지만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본고장 유학을 결심했다."

- 유학 생활은 어떠했는가?
"사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러시아 상뜨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대학 인형극학과에 들어갔다. 만학에 가난한 독학생의 유학 생활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유학 생활 동안 한국에 남아서 가계를 책임져준 아내의 후원이 가장 컸다. 또 고등학생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벌었다며 학비 100만원을 보탰다. 그것이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라고 생각해서 당연하게 받았다. 당연함 속에 내재된 의미는 모두 아실 것이다.

유럽지역에는 유서 깊은 인형극전문학교가 많다. 연기, 연출, 제작, 디자인학과 등 전공이 나눠져 있다. 혼자 4개 전공을 모두 섭렵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직접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장 먼저 강의실에 나가서 가장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지도교수님도 손가락이 몇 마디 없었다. 목각인형 제작에 살과 뼈를 바친 것이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환송회를 하던 날 교수님이 슬쩍 귀띔해준 말이 큰 힘이 된다. '미스터 김, 당신은 나의 최고의 제자였습니다'라는."

- 현재 작품 활동과 앞으로 계획은?
"<목각인형콘서트>를 사랑하는 관객을 위해 어디든지 달려갈 예정이다. 매년 참석한 과천인형극축제에도 갈 예정이다. 또 옛날 부산에서부터 해왔던 고아원 등 시설방문 무료공연을 계속할 것이다. 7월 중순까지 북촌창우극장에서 공연을 계속한다. 지금 하는 것은 연기자가 관객들에게 노출되는 콘서트형 인형극이다. 2층에 숨어서 인형만 노출되는 마리오네트도 구상 중이다.

또 인형극에 국악을 접목시켜 우리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구상중이다. 사물놀이, 줄타기, 동래학춤 등을 만들어 본고장인 유럽에 역수출할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한국적 마리오네트를 전 세계에 한류를 전하는 '대한민국 특산품'으로 만들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제자를 가르치고 싶지만 아직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간혹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지만 돈벌이 수단으로 덤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시키고 있다. 이 일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는 '끼'가 있는 사람을 제자로 맞고 싶다."

김종구 선생의 마리오네트는 콘서트 형식으로 연기자와 인형이 모두 노출된 채 관객 앞에 선다. 사진은 2004년 과천인형극축제 때 모습.
김종구 선생의 마리오네트는 콘서트 형식으로 연기자와 인형이 모두 노출된 채 관객 앞에 선다. 사진은 2004년 과천인형극축제 때 모습. ⓒ 인형극단 보물
- 마리오네트가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는?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태부족하다. 어디 가서 배울 곳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다. 내 자신도 아직 많이 모자란다. 두 번째는 경제성을 따지면 뛰어 들지 못하는 영역이다. 목각인형 한 개를 제작하고 연출, 연기를 습득하는데 적어도 3개월이 걸린다. 지금 무대에 올리고 있는 <목각인형콘서트>의 경우 2년간의 준비 작업 끝에 탄생한 것이다. 시간이 이처럼 많이 걸리다보니 안정적 후원이 없으면 엄두를 못 낸다. 문화가 자본에 예속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객석에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자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그는 경남 양산에서 작업하다가 최근 경기도 광주로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마리오네트 보급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큰 무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마음은 조용한 곳으로 내려가 제작에 몰두 하고 싶다고 했다. 도회 살이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벙긋 웃는다. 행복한 모습이다. 그는 한 대학교 특강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인생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분신인 색소폰 인형을 통해 행복하냐고 묻는 의미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인형극이 끝나고 난뒤 객석에서 진행한 행복한 인터뷰.
인형극이 끝나고 난뒤 객석에서 진행한 행복한 인터뷰. ⓒ 유성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