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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하고 DVD도 탑시다" 호주 선관위의 선거인 등록 캠페인.
ⓒ 호주 선관위 제공
"지방선거에 중앙정치권이 웬 호들갑인가"

호주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호주 동포들은 한국에서 치러진 5·31지방선거 소식을 접하면서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분명 지방선거인데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엔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지방선거 관련 뉴스가 연일 전국 단위로 보도되고 지방선거 투표가 전국적으로 같은 날 실시되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호주의 사정은 어떤가. 각 주의 형편에 따라서 다른 날 투표를 하다 보니 다른 주의 선거가 언제 치러지는 지도 모를 정도다. 언론에서도 다른 주의 선거는 결과만 작게 보도할 뿐이다. 물론 선거가 치뤄지는 해당 지역에서는 개표 실황을 생중계할 정도로 관심이 크다.

호주 유권자들은 중앙정부-연방정부의 업무와 지방정부-주정부의 업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자기가 선호하는 정책을 제시하는 후보에게 투표한다. 그런 연유로 연방선거에서 지지하는 정당과 지방선거에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른 경우가 아주 많다.

'보수' 연방정부와 '진보' 지방정부의 역할 분담

현재 호주 연방정부는 보수정당인 자유-국민 연립당이 10년 이상 장기집권(4기째 연임) 중이고, 6개 주정부와 2개 특별행정구(Territory)로 구성된 지방정부는 100%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다. 시쳇말로 노동당이 '싹쓸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호주에서 가장 큰 주인 뉴사우스웨일즈 주는 노동당이 10년 넘게 집권하고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호주 정치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유권자들이 연방정부에서 챙길 수 있는 실리(국익위주의 경제우선 정책)와 지방정부에서 챙길 수 있는 실리(교육·의료·복지)를 동시에 거머쥐겠다는 실리위주의 투표를 하기 때문이다.

보수정당이 연방 차원에서 나라 살림을 살찌우게 만들고, 진보성향의 지방정부가 분배 정책을 통해서 복지를 챙기도록 압박하는 것. 아울러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강하다.

2000만명을 약간 웃도는 인구가 살고 있는 호주에 전국을 커버하는 신문(전국지)은 <디 오스트레일리안> 하나밖에 없다. 발행부수에서도 <시드니모닝해럴드> 등의 지방지에 비해서 5분의 1 정도로 적다. 이런 현상은 방송도 마찬가지다. 로컬 미디어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호주 사람들이 자신이 거주하는 주에서 발생하는 뉴스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동부에 위치한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서부에 위치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에 가려면 비행기로 5시간이나 걸리다 보니 한 나라에 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호주는 '섬대륙'(Island Continent)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한반도 35배 크기의 대륙이지만 지구에서 가장 큰 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륙을 통째로 차지하는 나라도 호주가 유일하다. 이를 빗대 엘리슨 코테스(Alison Cotes)는 <섬대륙>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런 호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대목이 있다. 대개 1788년 호주에 백인국가가 생길 때부터 한 개의 나라였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6개의 개별적인 식민지 국가였다가 1901년에 하나의 연방국가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 당시, 6개 식민지 국가의 리더들은 하나의 통일 국가로서 거듭 나서 영국으로부터 당당하게 독립하자는 의지가 아주 강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연방국가 탄생이 탐탁치 않아 했지만 국경을 넘을 때마다 내야하는 관세가 없어진다는 이유로 정치리더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호주대륙에 6개 나라가 있다(?)

▲ "'뉴 사우스 웨일즈 팀이 퀸즐랜드 팀을 죽여 놨다(Blue Murder)"라고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뽑은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정이 이렇다보니 호주 6개 주의 특성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고 라이벌 의식 또한 강할 수밖에 없다. 현재 3연전을 치르고 있는 뉴사우스웨일즈 주와 퀸즐랜드 주 간의 럭비 경기는 '한일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연방정부 총리와 지방정부 총리들(2개 특별행정구 수석행정관 포함)이 모여서 갖는 연석회의 석상에서는 같은 노동당 출신의 지방정부 총리들 간의 예산 확보 경쟁이 아주 뜨겁다. 이곳에서의 예산 확보 결과에 따라서 자신의 능력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호주 헌법 51조에는 '지방정부와 주정부의 기능 및 통치권 분담'에 관한 사항이 명시되어 있다. 여기엔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국익 차원에서 함께 도모해야 할 사항으로 원활한 교역·국토방위 공조·사법기관 운용·국가기간시설 공동 건설 등이 나열되어 있다.

반면에 연방정부의 기능으로는 국방·외교·금융·통신·세금·이민 정책·대학교육 등이 명시됐고, 주정부의 기능으로는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의료·교통·경찰·각종사회복지시설 운영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중에서 만성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공공의료기관은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서로 임무를 떠넘기려고 애쓴다.

연방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맡고, 국민들을 직접 상대하는 살림살이는 주정부가 맡는 셈이다. 역할 분담이 이렇다보니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이 연방선거와 지방선거에서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지방선거에서는 분배와 복지를 중시하는 노동당을 선택해서 실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을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실리적인 투표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분배 보다는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치고 있는 자유-국민 연립당은 지방선거에만 나서면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런데 요즘 호주 정가에 떠오른 새로운 핫이슈가 주 단위의 '정계개편'이다. 퀸즐랜드 주의 자유당과 국민당이 아예 합당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지방선거에서 전패를 면치 못하는 자유-국민 연립당이 한두 개의 지방정부는 건질 수 있다는 계산인데, 퀸즐랜드 주 말고는 이 의견에 동조하는 세력이 없다.

노동당의 버팀목은 95%의 높은 투표율

▲ 호주의 투표장 풍경.
ⓒ 호주 선관위 제공
호주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고령화 국가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가 보수 성향을 띠는 상황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펴는 노동당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노동당이 지방선거에서 '싹쓸이' 할 수 있는 것은 젊은층이 투표에 적극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표일을 임시 공휴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휴일인 토요일을 이용해서 투표를 실시하는 상황에서 젊은층이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참고로 연방국회 의원을 선출하는 지난 2001년 총선에서 상원의 투표율은 94.8%, 하원의 투표율은 95.2%로 평균 95%라는 높은 투표 참여율을 기록했다.

현대인의 특징인 정치적 무관심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투표장으로 가는 것보다 스포츠 경기장이나 바닷가로 나가서 즐기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는 호주 사람들이 높은 투표 참여율을 보인 것이다.

그 원인 중의 하나로 호주를 비롯해서 도미니카공화국, 파나마 등 19개 국가에서만 실시하는 '강제투표법'을 들 수 있다. 18세 이상의 국민이 합당한 사유 없이 투표에 불참하면 벌금을 내야하는 '강제투표제도'는 "기권이라는 정치적 의사 표시를 막는 비민주적인 법"이라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호주에서는 벌써 80년째 내려오는 법이다.

도무지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국민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모으기 위해서 호주 의회는 '강제투표법'을 만들었다. 1924년에 법을 제정, 1925년 총선에서 세계 최초로 이를 실시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투표 안하면 감옥 갈 수도"
[인터뷰] 브라이언 할레트 호주 선관위 부위원장

그렇다면 강제투표제도 하에서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 것일까? 다음은 지난 2004년 4월에 가졌던 호주 선거관리위원회 브라이언 할레트 부위원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투표 불참자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하나.
"통상 투표 참여율이 95% 이상이기 때문에 실제로 처벌 대상자는 많지 않다. 게다가 불참자 5% 중에서 합당한 사유를 기록한 불참 사유서를 보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벌금을 내거나 법정으로 가는 사람은 1% 미만이다."

― 벌금은 얼마나 되고 선관위의 처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벌금은 20호주달러(1만6000원 정도)고 선관위에서 우편으로 통지한다. 그러나 선관위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법정으로 간다. 판사가 이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50호주달러의 벌금과 법정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다는 보도가 있는데.
"그렇다. 아주 극소수의 경우지만 이의신청 기각에 불복하거나 오랫동안 벌금을 내지 않은 사람은 짧은 기간 동안의 감옥형에 처해진다. 이런 케이스는 매 선거 때마다 생긴다."

―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감옥으로 보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선거법에 관해서 호주 선관위는 아무런 공식 견해가 없다. 입법기관인 의회에서 제정한 법을 집행할 따름이다. 처벌 또한 판사가 결정한다."

엄벌만 한다고? 아이디어 짜내는 호주 선관위

▲ 시드니 시청 앞의 풍경.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는 호주의 지방정부는 경제성장에 중점을 두는 연방정부와는 달리 분배와 복지 우선 정책을 펴고 있다.
ⓒ 윤여문
그렇다고 호주 선거법에 엄벌주의만 있는 게 아니다. 호주 선관위는 투표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서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동 투표소'도 호주 선관위가 창안한 성공 사례다. 양로원, 병원, 독립가옥이 있는 오지는 물론이고 감옥에까지 '이동 투표소'가 설치된 차량을 몰고 찾아간다. 호주에선 5년형 미만의 죄수들도 투표권을 갖는다.

이밖에도 호주 선관위는 유권자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한다. 사전 투표와 우편 투표 등이 그것. 선거일 20일 전부터 투표할 수 있도록 해 여행을 앞둔 유권자는 미리 투표할 수 있고, 거주지에서 8km 이상 떨어진 지역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우편투표를 신청할 수 있다.

투표를 한 다음이라는 조건이 붙지만, 호주 유권자들도 한국 유권자들처럼 투표일에 여행을 가는 건 마찬가지다. 유권자의 30% 정도가 사전 투표나 우편 투표를 하고 정작 선거 당일엔 여행을 간다는 통계가 있다.

호주 정치평론가 로리 오크의 말마따나 "간접 민주주의는 투표로 말하는 제도"다. 자신이 내는 세금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복지정책 등의 예산을 집행하는 기초단체장을 뽑는 지방선거 투표율이 50%를 약간 웃도는 것은 큰 문제다. 호주의 평균 투표율 95%와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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