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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선죽교 ⓒ 한성희

북녘 땅에 늦은 봄이 머물던 지난 4월 21일, 고려의 수도였던 북한 개성에 다녀왔다. 고려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쇠뭉치로 맞아죽은 다리로 유명한, 선죽교와 표충비는 개성 자남산려관 근처에 있다.

선죽교 다리 밑을 흐르는 마미천 지류 작은 개천에는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선죽교 다리 밑을 흐르는 마미천 지류 작은 개천에는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 한성희

선죽교는 돌난간으로 막아 사람이 다닐 수 없고 사람이 서 있는 돌판 위로 건너 다닌다.
선죽교는 돌난간으로 막아 사람이 다닐 수 없고 사람이 서 있는 돌판 위로 건너 다닌다. ⓒ 한성희
고려 초기에 놓였던 선죽교는 원래 이름이 선지교였으나 정몽주가 피살된 후에 그 자리에서 참대가 솟았다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바뀌었다 한다.

한 호의 글씨로 새긴 '善竹橋' 비.
한 호의 글씨로 새긴 '善竹橋' 비. ⓒ 한성희
마미천 지류인 작은 개울에 놓인 선죽교는 길이 8.35m에 넓이 3.36m의 작은 돌다리다.

선죽교는 북한의 국보유적 159호로 지정돼 있으며 보존이 양호하고 깨끗하다.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선죽교를 보호하기 위해 돌난간으로 둘러막고 옆에 돌판을 놓아 사람들이 건너다니게 했다.

현재 이 다리는 선죽교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건너다니고 있다. 개성의 늦은 봄 햇살을 받으며 선죽교를 건너가 본다.

다리를 건너가면 한호(한석봉)의 글씨로 선명하게 '善竹橋'라 새겨진 돌비석이 있고 비각이 있다.

선죽교 공원은 작았고,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나무들이 다리를 지키고 있었다.

표충비가 있는 비각 담장 너머 은행나무가 서 있다.
표충비가 있는 비각 담장 너머 은행나무가 서 있다. ⓒ 한성희
선죽교 앞에 있는 도로를 건너가면 표충비가 있다. 이 역시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이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해묵은 연륜을 말해준다. 은행나무가 넌지시 내다보는 한옥 담장이 아늑하게 느껴진다.

나라에 큰 일이 닥치면 눈물을 흘린다는 '거부기'. 앞의 비석은 1740년에, 뒤의 비석은 1872년에 세운 것이다.
나라에 큰 일이 닥치면 눈물을 흘린다는 '거부기'. 앞의 비석은 1740년에, 뒤의 비석은 1872년에 세운 것이다. ⓒ 한성희
비각 안에 커다란 거북 받침돌에 서 있는 두 개의 비가 있다. '개성시 인민위원회'가 표충비를 소개한 글을 옮겨본다.

이 비석들은 고려왕조에 절개를 지킨 정몽주의 <충의>를 <표창>하여 세운 것이다. 오른 쪽의 것은 1740년에 왼쪽의 것은 1872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다 같이 고려충신 정몽주를 찬양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그를 본받아 리씨왕조에 충성하도록 하기 위한 내용으로 씌어져 있다. 표충비의 높이는 오른쪽의 것이 3.17메터이고 왼쪽의 것이 3.58메터로서 비들의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부기는 당시 세련된 조각술을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각은 우리나라 력사연구에서 의의가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거북받침돌은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눈물을 흘린다는 유명한 전설을 갖고 개성사람들에게 전해왔다.

헉! 박물관 안에서 웬 그림 판매? 앞에 보이는 건물이 명륜당이고 명륜당 앞 은행나무가 높이 30m의 고목이다.
헉! 박물관 안에서 웬 그림 판매? 앞에 보이는 건물이 명륜당이고 명륜당 앞 은행나무가 높이 30m의 고목이다. ⓒ 한성희

고려시대 학생들의 숙소였던 동재는 현재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된다. 고려박물관에서 관람객에게 유물을 설명해주는 북한 여성 가이드가 느티나무 밑을 걸어오고 있다.
고려시대 학생들의 숙소였던 동재는 현재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된다. 고려박물관에서 관람객에게 유물을 설명해주는 북한 여성 가이드가 느티나무 밑을 걸어오고 있다. ⓒ 한성희
고려의 고도답게 수백 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유적지마다 세월을 껴안고 고고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저 은행나무는 고려의 흥망성쇠와 조선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고려 최고의 인재를 길러내던 국가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개성시 방직동)에도 동쪽과 서쪽에 두 그루의 당당한 은행나무가 연륜을 자랑하며 먼 옛날 고려왕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둘 다 30m가 넘는 고목이다.

1만㎡ 넓은 부지의 성균관은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동무, 서무 등 200여 칸의 건물 18동이 있다.

성균관 입구에서 당당히 지키는 저 해태상을 보라.
성균관 입구에서 당당히 지키는 저 해태상을 보라. ⓒ 한성희

용머리 한 쌍이 공자의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 계단 앞에서 지키고 있다 . 동쪽은 여의주가 없는 암룡(사진) 서쪽은 입에 여의주를 문 수룡이다.
용머리 한 쌍이 공자의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 계단 앞에서 지키고 있다 . 동쪽은 여의주가 없는 암룡(사진) 서쪽은 입에 여의주를 문 수룡이다. ⓒ 한성희
성균관 방문을 열면 사라진 고려왕조의 젊은 유생들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이렇게 시간은 흐르고 수백 년 전 인재들은 흔적도 없이 고요한 성균관 앞뜰에 한 쌍의 용머리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용의 얼굴이 어딘가 슬퍼 보이는 것은 봄날 오후 북녘 땅에 서 있는 내 상상의 끝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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