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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산의 아름드리 잣나무숲길.
연인산의 아름드리 잣나무숲길. ⓒ 김선호
한번 올랐던 산을 또 다시 가보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산행 후 그 산에 대한 기억이 좋았다면 다음을 기약하게 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겨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산이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는 다시 찾을 확률이 더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것도 같은 시기에 같은 코스를 택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경기도 가평의 연인산은 달랐다. 지난해 오월 중순경 연인산을 다녀왔는데 이 산의 아름다움에 한동안 흠뻑 빠져 지냈으며, 연인산을 찾기 위해 봄을 기다렸다. 오월을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매력적인 산이었다.

기초지식만을 가지고 처음으로 오르게 되는 산행과 한번 가 보았으므로 잘 알고 가는 산행은 그 느낌이 다르게 마련이다.

연인산(1068m)은 골이 깊으나 그리 험하지 않은 능선을 여럿 거느린 산이다. 연인, 우정, 장수, 청풍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능선은 봄이면 갖가지 야생화와 함께 산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해마다 오월이면 '연인산 들꽃축제'가 열린다고 하는데 올해는 지방자치선거가 있는 관계로 취소되었다 한다. 축제에 관련된 사람들에겐 얼마간의 피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산을 위해선 축제가 취소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둥그스름한 오름같은 연인산의 매우 특이한 정상능선은 해마다 다양한 꽃들로 뒤덮이곤 하는데, 그 능선이 작년에 비해 매우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인산의 진짜 주인인 들꽃들을 생각하면 축제가 취소된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갈수록 산을 찾는 등산인파가 줄을 잇고 있으니 산림의 훼손은 갈수록 심각해 질 것이 뻔해 보인다.

작년에 올랐던 대로 가평 마일리 국수당 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등산로 초입엔 한가로운 산촌마을이 펼쳐져 있다. 집집마다 영산홍이며, 황매화 그리고 금낭화가 심어진 뜨락(뜰)이 있어 정겨워 보인다.

등산로는 산길 한쪽에 흐르는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다. 몇 년 전에 일어난 산사태로 굴러 내린 돌들로 울퉁불퉁한 오르막길이 한참 이어졌다. 초장에 진을 빼놓는 오르막을 넘어서면 그곳에서부터 완만한 능선길이 기다리고 있고 우정능선과 연인능선으로 등산로가 갈라진다.

삼거리에서 함께 올라온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우정능선을 넘을 때 우리가족은 직진해서 임도로 나있는 길로 들어섰다. 우정능선과 연인 능선의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임도를 따라 계곡으로 이어진 길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한가롭기도 하거니와 계곡가를 따라 피어난 꽃들이 있어 아름다운 길이다.

능선을 타고 가자면 다양한 참나무들이 숲을 배경으로 산철쭉이 한창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계곡 주변으로 산비탈을 빼곡하게 들어찬 들꽃들의 행렬이 더 궁금했던지라 올해 역시 임도를 따라 가는 길을 택했다.

울창한 잣나무 숲이 맨 먼저 우리를 반긴다. 그 길 양편으로 아름드리 잣나무들이 사열하듯 서있어 자못 경건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몇 백 년은 묵었음직한 잣나무군락은 일대를 빽빽이 메우고도 끝 간 데가 없어 보인다. 잣나무의 둥치는 두 명의 어른이 마주 안고도 남을 만큼 우람하고 그 향기 또한 짙게 배어 나온다.

잣나무가 내 뿜는 진한 향취를 음미하며 걸으니 자연휴양림 속을 걷는 느낌이다. 이 잣나무 숲이 '비밀의 화원'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산괴불주머니' 군락지였다. 산괴불주머니란 꽃은 봄부터 여름까지 무리지어 피는 꽃이긴 하지만 그렇게나 넓은 군락을 이루고 피어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산길을 에돌아 걷다가 문득 노란빛에 이끌려 돌아보았는데 오른쪽 산 전체를 뒤덮을 듯 산괴불주머니가 피어있었다. 재배한 나물과 산나물이 다르듯, 가끔씩 산 아랫자락에서 보았던 산괴불주머니와 산 속 깊은 곳에서 청정한 기운 속에서 꽃을 피운 산괴불주머니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이렇게 울창한 숲엔 요정이 살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울창한 숲엔 요정이 살고 있지 않을까? ⓒ 김선호
"이런 숲에선 아마도 요정이 살고 있을 것 같아"라고 했던 아이의 표현에 감탄을 했던 숲길이었다. 올해도 산괴불주머니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그 길에 들어섰다. 그때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지난해 숲을 덮을 듯 피어난 산괴불주머니는 안 보이고 잡풀만 무성하다.
지난해 숲을 덮을 듯 피어난 산괴불주머니는 안 보이고 잡풀만 무성하다. ⓒ 김선호
아! 그런데 이런 일도 있는 것인지…. 울창한 잣나무 숲은 여전했건만, 산괴불주머니가 피어있어야 할 그곳에 단 한 뿌리의 산괴불주머니 노랑꽃도 보이지 않았다. 적잖이 실망스러웠지만, 바꿔 생각해 보니 아마도 들꽃들도 '해걸이'를 하는 모양이다. 아쉬움을 달래는 수밖에….

등성이 하나를 넘으니 잣나무 숲이 끝나고 이번엔 소나무 숲이 시작이다. 소나무 숲은 잣나무 숲의 울창함에 훨씬 못 미친다. 잣나무가 소나무에 비해 울창한 까닭은 나뭇가지 때문이다. 소나무는 한 가지에 바늘잎이 두 장인 반면, 잣나무는 한 가지에 다섯 개의 바늘잎이 붙어 있으니 멀리서 보면 잣나무가 소나무에 비해 훨씬 울창해 보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렇듯 하얀 바람꽃과 노랑 피나물꽃들이 지천이다.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렇듯 하얀 바람꽃과 노랑 피나물꽃들이 지천이다. ⓒ 김선호
잣나무가 울창해서 아름다웠다면 소나무는 성긴 바늘잎 사이로 햇살을 들여보내 갖가지 꽃들을 피워 냈다. 여기선 예상치 못한 피나무꽃 군락지를 만났다. 산괴불주머니를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인양, 산길 오른쪽 사면을 뒤덮을 듯 피나물꽃이 샛노랗게 피어 눈길을 끌었다.

피나물꽃은 활짝 피었을 때도 곱지만 필 듯 말 듯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모양도 앙증맞기 그지없이 예쁘다. 피나물꽃을 따라 들어간 소나무 숲이 끝나면 한동안 끊겼던 계곡물 소리가 들려오고 주변의 식생도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

다양한 낙엽활엽수로 들어선 숲은 이제 막 개화를 시작한 잎사귀들로 푸릇푸릇하다. 활엽수들이 잎을 틔우기 전에 부지런히 꽃을 피운 홀아비바람꽃과 피나무꽃들이 이곳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런 곳이라야 '비밀의 화원'이라는 이름에 가장 합당하리라 싶을 만큼, 저 홀로 들꽃들의 축제를 여는 현장이 바로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숨을 죽이고 들꽃들이 벌이는 축제의 현장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는다. 참나무류가 주종인 그 숲에 나뭇잎들이 무성해 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꽃을 떨어뜨리고 여름을 준비할 홀아비바람꽃, 꿩의바람꽃, 피나물꽃, 참개별꽃, 그리고 벌깨덩굴이 사이좋게 이웃하고 피어난 풍경은 정상능선을 오르기 전 산비탈까지 이어졌다.

완만하지만 지리하게 이어진 연인산 정상능선.
완만하지만 지리하게 이어진 연인산 정상능선. ⓒ 김선호
연인산의 정상능선은 제주도의 오름을 보는 듯 밋밋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루하게도 길게 이어져 있어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이 한마디씩 던지는 불만은 '대체 정상이 어디냐'이다.

비슷하게 생긴 능선을 넘고 또 넘어야 하는 지루하게 이어진 이 길은 능선 양쪽 사면에 얼레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결코 지루하지 마지않는 길이다.

정상 능선 어디를 보아도 얼레지꽃이 지천이다.
정상 능선 어디를 보아도 얼레지꽃이 지천이다. ⓒ 김선호
'연인산'이라는 이름의 전설이 깃든 정상 능선이 무려 아홉 마지기나 된다고 한다. 그 길을 따라 얼레지의 행렬은 정상까지 이른다. 얼레지는 노랑제비꽃과도 어울리고, 이 정상 능선에서 유난히 풍성한 꽃을 피운 양지꽃과도 어울려 말 그대로 '꽃밭길'인 까닭에 해마다 들꽃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또 얼레지 말고도 은방울꽃과 각시둥글레가 정상을 뒤덮을 듯 피어나 조심스럽게 산길을 걸어야 할 정도다. 지난해 두어 뼘이나 될까 싶었던 정상능선의 등산로가 불과 한해 사이에 두 배 이상 넓어져 있다. 점점 은방울꽃과 각시둥글레의 입지가 좁아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어디를 둘러 봐도 꽃이 천지여서 오가는 등산객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핀다. 저마다 한마디씩 얼레지꽃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등산객들을 만나는 일도 연인산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 넘게 되는 정상 능선은 처음보다 지루함이 덜했다. 꽃들의 천국을 이룬 이 능선에선 나무들이 저만치 물러나 있어 따가운 오월의 햇살이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 진다'는 연인산 정상석.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 진다'는 연인산 정상석. ⓒ 김선호
덕분에 발갛게 얼굴이 상기된 채로 정상에 올라서 본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연인산'이라는 정상석이 더욱 반갑다.

연인산 정상석 앞에선 사진 찍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 보였다. 넘치고 넘치는 사람들 틈을 벗어나 산 능선 아래 잎이 넓은 나무를 찾아 나선다. 완만한 오름 같은 정상능선에서 잎 넓은 나무를 찾기 또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능선길 어디서든 자리를 잡고 앉으면 그곳이 가장 적당한 휴식공간이 되어준다.

얼레지와 들꽃들이 어울린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고, 삼삼오오 어울려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 또한 그림 같았던 연인산 정상능선엔 가는 봄을 아쉬워하듯 올해 마지막 진달래가 붉게 피었다.

연인산에서 만난 올해의 마지막 진달래꽃.
연인산에서 만난 올해의 마지막 진달래꽃.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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