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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사상사
일상 속에서 한번쯤 일어날 것 같은

이 책에는 '우연한 여행자', '하나레이 만',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시나가와 원숭이'까지 단편 다섯 편이 실려 있다. 일상 속에서 한번쯤 일어날 것 같은, 혹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기담이라고는 하지만 기이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하루를 엿보는 느낌이다.

특히 이 책에 동원된 재즈나 페리에, 크레송 샐러드, 페리 엘리스의 감색 실크 셔츠 등 구체적인 소품들은 소설을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일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우연한 여행자'는 하루키가 미국 케임브리지에 살았을 때 겪었을 듯한 일을 소개한다. 재즈 클럽에서 하루키가 좋아하는 연주자가, 하루키가 원하는 곡을 두 곡이나 연주했다거나, 레코드 가게에서 페퍼 애덤스의 '텐 투 포 엣 더 파이브 스팟 (10 to 4 at the 5 Spot)'라는 LP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이 LP를 사들고 나오는데 시계가 4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거나 하는 식이다. 일상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우연으로 시작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10여 년 전 가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광화문 동십자각 앞에 있던 카페 '전인권'에 자주 들렀는데, 어느 날 함께 간 친구가 듣고 싶다던 노래들을 가수 전인권과 밴드가 아예 메들리로 부른 적이 있다. 정말 딱 그 친구가 듣고 싶다고 말했던 곡들만 연주돼 묘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기담이라는 새 그릇이 신선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글은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인데, 아파트의 24층과 26층 계단 사이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달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같은 아파트 24층에 사는 시어머니로부터 호흡이 곤란하다는 전화를 받고 나선 남편이 25분 후에 배가 고프니 식사준비를 해달라는 전화를 끝으로 실종된다. 여자는 이 사건을 사립탐정에게 의뢰하는데, 사라진 남자의 생활과 주변 환경을 이 책은 탐정의 시선으로 찬찬히 정밀 묘사한다.

도시에서,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아파트 계단에서 만날 수 있는 낯익은 풍경묘사나 이웃과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하루를 읽을 수도 있다.

사라진 지 20일 후 그동안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발견된 남편을 찾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심각하게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갖가지 썰 풀기 좋은 소재이지만, 하루키는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잔잔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주인공의 외출을 전해 줄 뿐이다.

소설가 하루키가 이 책을 소설집이 아니라 기담집이라는 이름으로 펴낸 건, 소설을 지겨워하는 오래된 독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 차원의 리폼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먹는 그 밥에 그 나물이라도 새로운 그릇에 담아내면 맛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동안 소설의 많은 부분을 시신경에 의존해 온 작가가, 일상 스케치를 기담이라는 새 그릇에 담아 내놓아선지 신선하게 다가온다.

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비채(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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