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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박 씨 이야기> 겉표지
ⓒ 문학동네
책을 읽다보면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 동물이나 식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글들은 주로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는 동화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이렇게 의인화된 동물들은 호랑이나 여우, 오리나 생쥐 등 우리 주위에 흔히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동물들이 주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걸까? 일단 친숙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친숙한 동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책에 대한 호기심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또한 의인화 된 인물들의 말과 행동, 생각을 읽어 내려감으로써 상상력은 물론 교훈까지 얻을 수 있다. <노박씨 이야기>도 동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슈테판 슬루페츠키의 <노박씨 이야기>의 주인공인 노박씨는 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콘트라베이스를 켠 다음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코트를 걸치고 단골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본다. 점심은 가볍게 먹고 오후엔 몇 가지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우편물을 뜯어보고, 편지를 쓰고 답답하면 산책을 하다 집에 들어오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이것이 노박씨의 하루 일과다.

언뜻 무미건조한 듯한 노박씨의 행동을 보고 이웃에 사는 쥐들은 게으르다며 이웃이 된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박씨는 무척 부지런하다. 그는 음악을 하고, 끊임없이 사색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만 이런 것을 머릿속에서만 할 뿐 남한테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해 그는 이웃들에게 상종하지 못할 게으름뱅이로 취급받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립 생쥐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치즈박람회에 갔다가 '깊고, 그윽하고, 다정한 눈'을 가진 아가씨에게 반하게 되고 상사병에 빠지게 된다. 그는 그녀를 찾아 헤매고 방황하면서 어떤 열정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 열정은 평소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분출하는 형태로 나타나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게 된다.

유명인사가 된 노박씨는 음반을 내고, 소설을 쓰고, 영화를 찍고,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열게 된다. 사람들은 그런 노박씨에게 열광을 하게 되고, 이웃들도 노박씨가 같은 이웃이라는 것에 기뻐하고 자랑을 한다. 보여줌으로써 열광에 빠지는 사람들. 미디어 세계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명인사가 된 노박씨. 그는 정말 행복을 얻게 되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허전해지고, 마음속의 내면의 소리와 다투는 일이 잦아지고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만 커져간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인기가 아니라 내면을 채워 줄 사랑이었던 것이다.

사랑이 필요한 그는 '릴라'라는 아가씨 쥐와의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에 빠진 노박씨는 스스로 행복한 쥐라 생각하며 자신의 행복이 깨지지 않길 기원하며 릴라에게 온갖 정성을 다한다. 그러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다락방에 처박아 둔 낡은 코트를 꺼내 입고 릴라에게 "당신을 사랑해…"하고 고백을 하지만 릴라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에요. 함께 있어 즐거우면 그뿐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그걸로 끝인 거구요."

릴라의 이 한 마디는 노박씨에게 비수처럼 박혀 충격을 주게 된다.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에요. 함께 있어 즐거우면 그뿐이에요." 이 한 마디는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하는 핵심이다. 노박씨의 사랑법이 사랑하고 좋으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릴라의 사랑법은 그게 아니다. 함께 어울리며 즐거우면 되는 것이지 사랑을 통해 상대를 차지하려고 한다거나 구속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사고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사랑법을 작가는 암유적으로 말하려고 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노박씨는 릴라의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라는 그 말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는 구애 공세를 한다. 자신이 쓴 소설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자신이 만든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며 릴라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는다.

이로 인해 노박씨는 매일매일 조금씩 작아지고 약하고 슬픈 모습으로 변해가지만 릴라는 혀를 찰 뿐 조금도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는다. 결국 노박씨는 우표 속의 모자 만하게 작아지고 게으름 속으로 빠져든다. 그녀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이 그를 아주 작은 생쥐로 변하게 한 것이다.

삶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한 채 왜소하게 변해버린 노박씨는 릴라가 자신을 멀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정답을 알아내지 못하고 화를 내게 된다.

그런데 그 화는 원망으로, 원망은 노여움으로, 노여움은 이내 분노로 변해버리고 버린다. 그리고 그 분노로 인해 노박씨는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되고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말은 릴라가 노박 씨에게 했던 말과 비슷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나는 나야! 그리고 네 말대로 넌 바로 너지! 넌 소중한 내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어!"

노박씨가 "나는 나야!"라고 외치는 장면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릴라의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야"라는 말이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성을 이야기하고 순간을 중시하는 세대의 모습이라면, 노박씨의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음으로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 노박씨가 맞이하는 겨울, 그는 그 겨울에 새롭게 삶을 바라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모든 건 마음속에 있는 거야. 내 밖에 있는 게 아니라구."

이 소설에서 큰 장치 중의 하나는 '낡은 코트'와 노박씨의 '작아짐과 원래 상태로의 복원'이다. 노박씨는 자신의 진정성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나 자신을 찾고자 할 때 낡은 코트를 입는다. 그리고 노박씨의 작아짐은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해버렸을 때의 현대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음은 물론 삶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세상을 따스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짐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다"는 노박씨의 마지막 말처럼 삶의 기쁨과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 자라는 나무임을 알 수 있다. 마음 따라 말 가고 행동이 간다고 했다. 슈테판 슬루페츠키의 <노박씨 이야기>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노박씨 이야기

슈테판 슬루페츠키 지음, 조원규 옮김, 문학동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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