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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투성이에 비닐 커버까지 찢겨진 아기침대가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는 광화문역(왼쪽).  아늑하고 화사한 분위기의 영등포 L백화점 유아휴게실
먼지투성이에 비닐 커버까지 찢겨진 아기침대가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는 광화문역(왼쪽). 아늑하고 화사한 분위기의 영등포 L백화점 유아휴게실 ⓒ 우먼타임스
김씨는 7개월 된 딸아이를 데리고 외출한 날 젖 달라고 보채는 아이를 데리고 수유실을 찾았다가 음침하고 외진 수유실 안으로 들어가기가 꺼려져 안절부절 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수유실에 노숙자들이 드나든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울 고속터미널역과 광화문역의 수유실은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역무실 직원은 노숙자들의 침실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내부 공간과 시설물 역시 한눈에 봐도 수유실로 활용되기에는 부족했다. 광화문역 수유실의 경우 아기를 눕히기 망설여질 정도로 침대가 더럽혀져 있고(심지어 찢겨진 것도 있다) 수유에 꼭 필요한 수도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 두 곳 모두 안내 표지판과 별도의 관리자 없이 인적이 드문 곳에 마련돼 있는 것도 문제점이다.

서울 용산역 신청사 여자 화장실 한편에 마련된 수유실도 썰렁하긴 마찬가지다. 세 평 남짓한 수유실 내부에는 의자 3개와 세면대 1개만 달랑 마련돼 있고, 화장실 공간을 분할해 수유실을 마련한 탓에 악취까지 난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용하려 해도 팔걸이형 의자에 앉아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기는 힘들어 보인다.

광화문역 수유실에는 수도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채 세면대만 마련돼 있다.반면 백화점 유아휴게실에는 젖병, 소독기구까지 구비돼 있다.
광화문역 수유실에는 수도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채 세면대만 마련돼 있다.반면 백화점 유아휴게실에는 젖병, 소독기구까지 구비돼 있다. ⓒ 우먼타임스
비교적 깨끗하고 안락한 KTX 부산역 수유실도 이용률은 저조하다. 수유실 내부가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 여러 개의 아기침대가 마련돼 있어 기저귀를 갈기에는 괜찮지만 수유를 하기엔 부적당한 장소인 셈이다.

여성들은 "역내 수유실은 마음 놓고 모유 수유를 할 만한 장소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현재 서울 시내 공공장소에 마련된 모유 수유실은 서울 용산역 신청사를 비롯, 광화문역과 고속터미널역 등이 있지만 이용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역내 수유실 이용률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 도시철도 홍보팀의 관계자는 "공간이 협소하고, 지하 공간에서 장시간을 보내는 여성들이 적다 보니 활용도가 낮은 것 같다"며 "지난 2004년 초 서울 용산역 신청사와 광화문역 등이 수유실을 시범 설치한 이후 지금까지 추가된 곳은 없으며 앞으로 추가 설치 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현재 역구내 수유실 관리는 역무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아기를 둔 여성들은 지하철역을 비롯, 공공장소 내 수유실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직 수유가 필요한 아이를 동반하고 외출하는 데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역구내 수유실 쓰레기통에 아기 기저귀가 악취를 풍기며 버려져 있다(왼쪽). 백화점 유아휴게실은 전자레인지, 아기 저울, 정수기 등을 기본시설로 갖추고 있다(오른쪽).
역구내 수유실 쓰레기통에 아기 기저귀가 악취를 풍기며 버려져 있다(왼쪽). 백화점 유아휴게실은 전자레인지, 아기 저울, 정수기 등을 기본시설로 갖추고 있다(오른쪽). ⓒ 우먼타임스
생후 9개월 된 아들을 둔 김지선(29·서울 방화동)씨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외출할 때는 언제 아기가 잠이 들지, 언제 수유를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유아휴게실은 꼭 필요하다"며 "이런 문제 때문에 모임도 유아휴게실이 있는 백화점이나 백화점 주변 음식점에서 갖는다"고 말했다.

한편 서비스의 질이 매출과 직결되는 대형마트, 백화점, 패밀리 레스토랑 등의 수유실에서는 다른 풍경이 연출된다. 썰렁한 역구내 수유실과 달리 아기를 안은 엄마들로 항상 북적이는 것. 4월 11일, 영등포 L백화점 6층. 아동복 매장으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입구로 들어서자 아늑한 조명과 깔끔한 인테리어를 갖춘 매장이 눈에 들어온다. 연둣빛 커튼으로 입구를 차단해 놓은 이곳은 수유와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유아휴게실.

7평 남짓한 휴게실에서 여성들은 아기 기저귀도 갈고, 젖병도 소독하고, 유아식을 먹이기도 한다. 휴게실 안쪽에 따로 마련된 수유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휴게실 한쪽에는 우유 데울 때 필요한 전자레인지와 정수기, 아기 저울 등도 구비돼 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 바빠요. 아이를 데리고 엄마들이 쇼핑 중에 한 번은 들르기 때문에 많을 때는 이 공간에 10명 이상이 머물지요. 엄마들의 심리적, 육체적 안정을 위해 관리사들이 파트타임으로 상시 근무합니다."(L백화점 유아휴게실 관리사)

근처에 위치한 S백화점의 유아휴게실도 비슷한 모습이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관리자가 유아휴게실을 이용하는 여성들을 친절하게 맞이한다. 휴게실 관리사는 쇼핑을 하다 잠이 든 아기와 잠시 쉬려고 들르거나 모유 수유, 이유식 등을 먹이기 위해 찾는 아기 엄마들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모유수유 전문가들은 수유실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설계부터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공장소에서 수유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안내 푯말, 아늑한 분위기의 실내, 유축기를 사용할 수 있는 전기시설과 수도시설 마련은 필수라는 것이다.

(사)내일여성센터 부설 탁팀맘의 권현정 소장은 "수유실은 안전하고 청결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엄마와 아기가 마음 편하게 교감을 나누며 수유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라며 "공공장소의 수유실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여성의 감수성을 고려한, '여성에게 친근한 수유실' 설계와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권 소장은 "모유수유율을 높이고 모성 보호를 위해서는 공공장소는 물론 직장 내 수유실 설치가 꼭 필요하다"며 "화장실에나 여직원 휴게실에서 모유수유를 할 경우 유축기 등의 소음 때문에 미혼 여성들이 항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선진국 스웨덴에선...
인식변화·시설확충 덕 모유수유율 97% 껑충

모유 수유의 선진국으로 불리는 스웨덴의 모유 수유율은 지난 1970년대 30% 수준에 머물렀지만 현재는 제도 개선 등을 통해 97%까지 올랐다.

전문가들은 스웨덴 국민들의 인식 변화와 공공시설의 수유실 확충으로 마음 놓고 젖을 먹이는 엄마들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모유 수유율은 16%. 다른 OECD 국가들의 40~50%에 비해 턱없이 낮은 상황이다. 이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공공시설에 수유시설을 마련하는 등 육아 친화적인 사회를 조성,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국회 보건복지위)은 지난해 8월 임산부의 편의를 증진하기 위해 공공건물 및 공중이용시설에 수유시설 등 육아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장애인·노인·임산부 편의증진보장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안 의원은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 가중으로 출산 기피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며 "수유시설 의무화를 통해 임산부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의 모유 수유실 확대 설치 바람도 불고 있다.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와 국회도서관,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 보건복지부 등에 모유 수유실이 마련되어 있다. 경남도는 지난해 수유를 원하는 여직원들의 복지개선을 위해 도청 내에 모유 수유실을 마련했다. 도내 각 시·군구와 교육청, 병원 등에서도 경남도의 협조 요청에 따라 자체적으로 수유 시설을 갖추는 등 임산부와 출산 여성에게 친화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수유실 이용율은 설치보다 철저한 관리에 달려 있다. 경남도청 여성정책과의 관계자는 "도청 수유실의 경우 매일 청소 상태 등을 점검하기 때문에 청결한 상태가 유지되며 여직원을 비롯, 일반인들이 편리하게 수유를 할 수 있도록 냉장고, 소파, 전자레인지 등 기본 비품도 마련해 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운영 모유수유실은 '개점휴업'
외진자리 위치, 노숙자 들락거려 이용 어려워

정부가 공공장소에 수유실 설치를 확대하고 있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무늬만 수유실'로 전락하고 있다.

서울 용산역 신청사, 서울지하철 고속터미널·광화문역 등의 공공장소에 수유실이 설치돼 있지만 이용자는 거의 없다. 수유실 안내 푯말을 찾아보기 힘든데다 외진 자리에 위치해 노숙자들까지 들락거리는 등 방치돼 있는 실정.

4월 13일, 광화문 역구내에서 만난 이 모(29)씨는 "갑자기 아기가 잠이 들어 수유실에서 쉬다 가려고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고, 수유실 자체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어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유명무실해진 공공장소 내 수유실은 모유수유율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 지난해 12월, 전국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 133곳의 방문자 872명을 대상으로 모유수유 실태를 조사한 결과 여성들은 모유수유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공공장소에서 수유 불가능'(32.8%)을 꼽았다.

모유수유 전문가들은 쾌적한 수유실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 강화와 함께 공공장소 내 수유실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신순철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 홍보실장은 "어디서나 모유수유가 가능한 사회적 풍토가 마련돼야 저출산 문제 해결도 가능할 것"이라며 "친여성 ·유아적인 사회풍토 조성을 위해 공공장소와 직장에 모유수유실, 착유실을 확대하기 위해 캠페인을 전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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