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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르네상스
지난 20년 동안 악의 역사를 탐구한 학자가 있다. 바로 '제프리 버튼 러셀'이 그다. 그는 '악의 개념사'를 역사별로 정리했다. 그 가운데 제 1권인 <데블>은 성서의 신약시대를 관통하는 초창기부터 그 주제를 다루었고, 제 2권인<사탄>은 5세기까지의 초기 기독교를 다루었으며, 제 3권인 <루시퍼>는 중세기를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4권에 해당하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종교개혁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악마의 개념사를 다룬 것이다. 앞의 세 책은 악마의 개념사을 두고 볼 때 어느 정도 일치점이 있다. 성서와 전통이라는 그 흐름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네 번째 책은 여러 갈래의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만큼 이 시기에는 세상과 사회가 다변화되었고, 여러 이념과 학문과 과학이 그야말로 부흥기를 이루었고, 또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 속에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을 '메피스토펠레스'라 이름 지은 데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을 따온 것인데, 그 이름마저도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식이거나 민간 전승에서 온 이름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의 뜻을 담고 있는 낱말들의 합성어이다. 그만큼 이 시기가 '악마'를 둘러싼 격변기로서 다분화 되었으며, 다채로운 현상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그것을 계기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진영이 나뉘게 된다. 그 당시 개신교를 대표한 신학자를 꼽는다면 루터와 칼뱅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갖고 있던 악마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가톨릭적 견해와 다를 바 없었다. 이른바 성서와 전통 사이에서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 마녀광란이 불신을 받게 되자, 그때부터 악에 대한 개념들도 두 진영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더불어서 그때 당시 중심에 서 있던 문학작품도 한 몫 톡톡히 했으니, 그게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였다. 그 작품 속에는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루시퍼의 하수인인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한다.

"주요 요소들은 '아니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메(me), '빛'이라는 의미의 포스(phos), 포토스(photos), 그리고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의 필로스(philos)인데, 결국 '빛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 되어, '빛의 담지자'라는 의미의 루시퍼에 대한 반어적 패러디가 된다."(79쪽)

더 놀라운 것은 괴테의 문학작품에 이어,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으로 유명한 <햄릿>이나 <오셀로> <리어왕>, 그리고 <맥베스>에서도 그와 유사한 악령과 악령들의 속성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뒤 유물론이 등장하는 17세기와 계몽주의가 일어나는 18세기에는 그야말로 기독교 전통은 그 기반까지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회의주의 노선에 서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데카르트, 그리고 스피노자와 로크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악마론이 추락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칸트나 밀턴의 <실락원>과 <복낙원>같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악마론의 추락을 막아보긴 했지만, 계몽주의 시대 말에 달해서는 그야말로 악마라는 개념 자체마저 폐기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낭만주의 영향에 힘입어 강력한 상징으로서의 악마가 되살아난다. 이른바 나폴레옹과 같은 독재정치를 일삼는 포악한 자들을 일컫는 상징이었다. 그 때문에 군주제주의자들과 전통적인 가톨릭 주의자들은 혁명을 악마의 소행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스도는 왕이었고, 모든 왕들은 사악했다. 그러므로 최고의 왕이 최대의 악인 것이다. 혁명주의자들은 사탄을 부당한 질서와 구체제의 전제정치, 그리고 그 정치를 보좌하는 제도-교회, 정부 그리고 가족-에 대항하는 반란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267쪽)

그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있다면 빅토르 위고였다. 그는 전쟁과 폭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름대로 밀턴 이래로 가장 깊이 있게 악마를 묘사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9세기에 이르러서, 악마는 다소 냉소적인 은유로 미화된다. 문학이나 미술, 그리고 음악에서 대중적인 지위를 얻는 정도였다. 물론 그것들이 공포물이나 희극에 많이 이용되었기에,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까지 파고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세기 말에 달해서는 그 유명한 네 명의 사상가들이 악에 대한 여러 논의를 이끌었다. 다윈, 마르크스, 니체, 그리고 프로이드가 그들이다. 다윈은 종교와 과학이라는 이분법을 낳은 인물로 꼽히고, 마르크스는 실증주의와 유물론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악마 자체를 부정했고, 니체는 기독교의 악마를 천박한 개념으로 이해했고, 그리고 프로이드는 형이상학적인 악의 개념보다는 무의식의 심층을 상징하는 존재로서의 악마에 매료됐을 뿐이다.

물론 이 당시에도 문학작품 속에는 간간이 악마에 대한 개념들과 그 속성들이 나타난다. 마크 트웨인의 <불가사의한 이방인>이나 조반니 파피니의 <몰락한 사람>,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등과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는, 악마가 분명코 초월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행위 속에 가장 잘 드러나는 존재로 묘사했다.

"1914년 이래로, 세계대전, 유대인 대학살, 캄보디아 대학살, 기근, 그리고 핵전쟁에 의한 전멸의 위기와 더불어 인간이 겪는 고통의 강도는 새로운 전기에 도달하게 되었다."(405쪽)

이런 일들로 인해 20세기에 달해서는 그야말로 악마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들끓기 시작했다. 대량 학살과 전쟁, 끊임없는 테러와 전쟁도발, 각 나라별 이권 다툼과 종교 분쟁 등이 그 논쟁의 한 가운데 있었고, 지금껏 논의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것이다.

지금껏 악마의 개념사를 읽어봤다. 이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성서와 그 전통의 밑뿌리는 변함이 없겠지만, 그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은 다분히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이단의 세력으로, 마녀 행위로, 이교도의 광란으로, 무고한 인간들의 살육 행위자로, 포악한 정치지도자로 변신에 변신을 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하나의 틀로 규정될 수 없이 다분화되고, 다양화 됐다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악마의 개념은 그만큼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서서 '악마는 그것 하나 뿐이야'하고 단정한다면 그야말로 악마에 대한 무지의 소지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 - 악의 역사 4, 근대세계의 악마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르네상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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