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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책 표지 ⓒ 이론과실천
정체성(正體性).

정ː체(正體)
1.본디의 참모습. 본체(本體).
2.본마음.(네이버 국어사전 발췌)

영어로는 아이덴티티(identity). 동일하다는 뜻에서 비롯되어, 장소나 사람의 아이덴터티는 다른 것과 구분이 가능하게 하는 성질을 가리킨다.

‘정체성’이란 단어는, 자아 정체성 확립이나 올바른 성 정체성 확립이 중요하다고 할 때 가끔 듣게 되는 단어이다. 이럴 때의 정체성은 올바르게 그리고 잘 확립해 놓아야 할 무엇이란 느낌의 단어이다.

그런데 <사람 잡는 정체성>이라니, 책 제목이 왜 이럴까? 때로 정체성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소속감’이 사람에게 얼마나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제목만 보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편 가르기다. 여자/남자, 유색인/백인, 기독교/이슬람교. 부자/빈자 등등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편 가르기가 있는가? 이 책은 좀 더 큰 관점에서 편 가르기의 폐해에 대해 얘기한다.

책 내용에 앞서, 저자를 살펴보자. 아민 말루프(Amin Maalouf). 국내에는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라는 책으로 이름이 알려진 편이다.

이 책은 유럽 쪽 시각에서 마치 성스러운 전쟁인 양 묘사되어왔던 십자군 전쟁을, 실제 침략당한 아랍인의 시각에서 기술한 것으로 출간 당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유럽인의 이분법은 이교도의 여인과 아이들을 무참히 살육하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했으며, 이교도의 사체를 요리로 삼는 것은 그네들의 기준에서 식인 행위가 아니었다.

아랍인과 십자군이 각기 적성 공략에 성공했을 때의 포로 취급 방식의 차이는 두 문화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예라 하겠다. 침략당한 쪽에서 봤을 때 번쩍이는 갑옷의 정의의 기사 따위는 없었다. 탐욕스럽고 무지한 미개인이 있었을 뿐. 억지스럽지만 십자군=일본, 아랍인=조선인으로만 대입해 보자. 더 설명이 필요할까?

다시 저자에 대해 알아보자.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 출신의 아랍인이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아니라 전통적인 기독교 정교회파 집안 출신이었으며, 20대 후반의 나이에 프랑스에 정착하여 지금은 프랑스인인 묘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랍 사회의 기독교인, 기독교 사회의 아랍인. 항상 사회적 소수 공동체에 속할 수 밖에 없었던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정체성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남달랐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책의 출간연도이다. 국내에서 2006년 번역·출간되었지만, 원래 책의 출간연도는 1998년이다. 긴 기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책이 지금 생명력을 가지는가? 그 이유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아민 말루프가 1998년 당시 예견했던 불길한 미래가 현재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세계화나 문명간의 이해가 현재(1998년 당시)와 같은 흐름으로 진행될 경우,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으로 예측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걱정은, 2001년 9·11 테러와, 런던 폭탄 테러, 프랑스와 호주의 인종 충돌 등의 사건 이후 더욱 가속화 되고 있는 ‘문명간의 충돌’로 가시화 되었고, 이런 문명간의 충돌은 보수 기독교 세력 휘하의 미국 주도 하에 끝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가 왜 세계화에 대해 고민하였을까? 만일 현재의 세계화가, 모든 사람이 서로의 차이와 문화를 존중하고, 자신의 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더 큰 지구(地球)적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진행과정으로써의 세계화라면 걱정할 것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화는 어떠한가? 과연 진정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세계화일까? 세계화란 단지 ‘미국화’의 다른 말이 아닐까? 미국식 패스트푸드를 먹고, 미국식 옷을 입고, 미국식 사고방식이 횡행하고, 가정에서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감자칩과 콜라를 즐기는. 이것이 1998년 당시, 그리고 현재에도 유효한 세계화의 지표가 아닐까? 영어 문법에는 통달해도, 국어 문법의 기초도 모르는, 국적마저 미국인이 국토를 메워가는 이것이 세계화일까?

이런 삐딱한 세계화는 개인이나 국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만일 자신이 자란 배경, 사회, 문화의 고유한 가치가, 미국 혹은 타문화가 가져다 주는 가치보다 못하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반응으로 순응·포기 혹은 반항·집착의 행태가 생겨난다. 순응과 포기 행태의 경우, 한 개인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던 전통적 가치가 사라지면서, 말 그대로 뿌리 없는 나무가 되어 정신적 방황을 겪게 된다. 반항과 집착의 행태 또한 전통적 가치에 집착하면서 배타적인 자세를 고수해 결국은 문명 간의 충돌만을 초래한다.

빠른 물질적 근대화를 바탕으로 서양이 강요해 온 이런 삐뚤어진 세계화와 이로 초래될 미래에 대한 걱정, 그리고 실제 이러한 행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국가들과 민족들을 예로 들어가며, 저자는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세계화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새로운 사고법에 대한 소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가 꿈꾸는 세계화는 다음과 같다.

"누구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통의 문명으로부터 소외되는 느낌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또 각자는 거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고유한 언어와 자신의 고유한 문화가 가지는 어떤 상징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출간 10년이 다 되어감에도 여전히 세계화가 바른 길을 향해 나아갈 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동시에,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잘못을 묻는 것 또한 조심해야 할 일이다. 저자가 생각했던 이런 개념은 사실, 사회의 하부 구조부터 국가를 초월한 상부 구조에까지 모두 통용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를 구별하여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 되겠지만, 나와 너를 구분하여 배타시 하는 것은 파행적 사회로의 첫걸음일 것이다.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다.

저자가 말하듯 각 사람마다 서로 다른 배합에 따라 정체성을 형성하는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60억 명이 있는 지구라면, 60억 가지의 사랑이 있다고 하듯, 60억 개의 특별하고 소중한 정체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의 세계화는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은 무시한 채, 국가적 혹은 민족적 정체성으로 회귀하기를 강요하여 각종 폐단을 낳고 있는 것이다.

저자 아민 말루프가 책의 마지막에 남긴 글이 있다.

"나의 손자가 어른이 되어 어느 날 가족의 서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대충 훑어본 다음, 이내 제자리에 갖다 놓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신의 할아버지 시대에는 아직도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길 바랄 뿐이다.“

아직 그의 손자가 있는지, 책을 읽을 나이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와 같은 기대를 하려면 몇 세대는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여전히 그의 고민과 해결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과연 이런 삐딱한 세계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없는지 되돌아본다. 외국 노동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차별과 냉대, 관광지에서의 어글리(ugly) 코리안 정도가 예가 되지 않을까? 우리 또한 삐뚤어진 세계화 속에 우리만의 새로운 ‘문명 간의 충돌’을 준비하고 있는 ‘불건전 세계화 세력’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덧붙이는 글 | 사람 잡는 정체성 | 아민 말루프 지음 | 박창호 옮김 | 이론과 실천 | 2006


사람 잡는 정체성 - 이실문명총서 3

아민 말루프 지음, 박창호 옮김, 이론과실천(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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