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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를 의인화한 연극 <토기장이>의 한 장면.
토기를 의인화한 연극 <토기장이>의 한 장면. ⓒ 유성호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사랑한다.'

아주 오래전 한 토기장이는 자신이 빚어낸 많은 토기 중에서도 모양이 뒤틀어진 한 토기를 사랑했다. 물론 빚은 의도대로 쓰임새가 있는 예쁘고 단아한 토기들도 사랑했지만, 여느 토기장이처럼 뒤틀어진 토기를 매정하게 부숴버리지 않고 더욱 귀하게 여겼다.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생긴 존재라도, 언제, 어느 곳에서는 반드시 귀하게 쓰일 수 있다는 토기장이의 깊은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토기장이는 볼품없는 '물두멍'을 왜 만들었을까

4·19 영령들의 눈물인 양 봄비가 변덕스런 바람을 타고 흩뿌리던 19일, 서울 혜화동 대학로에 위치한 공연장 '예술마당'을 찾았다. 대사가 있는 이미지 퍼포먼스라는 색다른 장르의 연극을 보기 위해서다.

지난 7일 막을 올린 <토기장이>는 5개의 토기를 의인화한 이야기다. 각각 '욕심' '열정' '거만' '못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토기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쓸모 있으며, 더 강하고 때론 독특하다고 으쓱거리며 티격태격한다.

하지만 '물두멍'이란 이름의 토기는 빚는 과정에서 뭐가 잘못됐는지 온 몸이 뒤틀려서 볼품없는 모양이다. 그런 물두멍을 친구들은 토기 세계에서 따돌린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물두멍이지만 그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고 자신을 빚어낸 토기장이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토기장이는 한 소녀에게 물두멍을 선물한다.

소녀는 단 한번도 스스로 걸어 본 적이 없는 몸이다. 온 몸이 뒤틀리는 뇌성마비를 안고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물두멍과 소녀는 많이 닮았다. 자신을 빚어낸 '손'을 원망하기는커녕 그 뜻을 헤아리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들은 이내 친구가 된다.

물두멍, 자기와 닮은 소녀를 만나다

연극 <토기장이>의 특징은 무대의 색감이 아름답다는 점이다.
연극 <토기장이>의 특징은 무대의 색감이 아름답다는 점이다. ⓒ 유성호
소녀의 따뜻하고 온화한 손길은 흙덩이 물두멍의 몸 속에 수로를 만들고 그의 내면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물두멍 역시 소녀에게 위안과 평안을 주면서 동병상련보다는 용기를 북돋운다.

물두멍의 쓰임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토기친구가 오만과 교만으로 자신을 뽐내면서 응달을 벗어나 뜨거운 볕이 내리쬐는 곳에서 까불다가 온몸이 갈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다. 물두멍은 자신의 수로를 열어 뻣뻣이 굳어 가는 그를 되살린다. 그동안 자신을 '왕따' 시킨 나쁜 친구지만 물두멍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토기장이의 목소리가 이해된다.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사랑한다"던. 그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물두멍의 순종이 아름다운 열매로 맺히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연극은 이미지 퍼포먼스답게 역동적이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이글거리는 가마 속 2000도의 불꽃이며 조명, 음향이 현실감 있게 뜨거움으로 전해진다. 원래 전공이 무대미술인 연출가 변창희씨의 솜씨답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토기장이가 휠체어에 앉은 소녀에게 물두멍을 전달하는 순간이다. 실루엣으로 처리됐는데, 토기장이에게서 물두멍을 받는 소녀의 손끝이 심하게 굽어 있다. 실루엣만으로 보기에도 힘겨운 모습이다. 소녀의 정체는 연극이 모두 끝난 후 무대 인사를 할 때 비로소 밝혀진다.

1분 동안 가려진 커튼 뒤에서 열연한 이는 바로 서민정씨. 올해 마흔 셋의 '소녀'다. 그녀의 작은 체구는 휠체어 안에 폭 담겨 있었다. 뒤틀리는 오른손을 진정시키랴, 휠체어 바퀴를 돌리랴, 왼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는 선천성 뇌성마비로 지금껏 제대로 걸어 본 적이 없다.

그녀에게 말을 걸다

뇌성마비 배우 서민정씨.
뇌성마비 배우 서민정씨. ⓒ 유성호
수줍은 듯 무대 인사를 마친 그녀를 인터뷰하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그녀의 미소 때문이다.

인터뷰는 한편의 퍼포먼스처럼 진행됐다. 일상적인 대화는 어렵지만 상대방이 말한 의도가 본인 생각과 맞으면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연극에 출연하게 된 동기는 원작자인 동생의 권유 때문이란다. 그런데 언니의 잠재적 능력에 동기부여만 했을 뿐이라는 동생 은영씨의 말이 더 맞을 듯싶다. 그 정도로 그녀가 연극무대에 갖는 애착과 열정은 남다르다.

많은 날을 좁은 방안에 머물면서 원망과 자괴감 속에 살았음직한 그녀의 변신은 주위를 놀라게 했다. 가족들조차 몰랐던 그녀의 용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동생의 조심스런 출연 제의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동의했고 짧지만 묵직하고 비중 있는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배역에 걸맞는 출연료를 보장받은 것은 물론이다. 출연료가 얼마냐는 질문에 그녀는 함박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나중에 출연료를 받으면 커피 한잔 사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고개를 크게 여러 번 끄떡였다.

비록 1분. 그것도 그림자로 출연하는 단역이지만, 주연 격인 물두멍이 그녀의 분신임을 알아차린다면 그녀는 이 연극의 숨겨진 주연이다.

이날 두 딸과 함께 연극을 보러 온 한 엄마는 그녀를 직접 보고는 감동한 나머지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먹먹해진 가슴을 오랫동안 보듬는 모습이었다. 서민정씨를 지켜본 모든 이들 사이에 공유된 감정이리라.

단 1분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

공연장을 찾은 아이들과 그녀는 한참 동안 몸짓과 쉽지 않은 언어로 교감하고 있었다. 연극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감동을 준 것일까. 아이들 눈에는 그녀의 장애가 더 이상 별스런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토기장이가 물두멍에 담은 오묘한 이치를 어느새 알아버린 듯했다.

더이상 슬픔이 아닌 기쁨과 희망을 담은 그녀의 큰 눈망울이 아이들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 그녀의 눈빛은 연극 팸플릿에 글자가 되어 녹아 있었다.

"나는 날 때부터 뇌성마비라는 중증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단다. 자라면서 내 모습이 다른 사람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뒤틀어지는 내 모습에 화가 나서 원망해 많이 울기도 했단다. 애들아…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 십자가에 빛이 비추이더니 그 분을 만났단다.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사랑하는 딸아, 아무도 원망하지 말아라! 딸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커튼콜을 보낸다.

연극이 끝난 뒤 출연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서민정씨.
연극이 끝난 뒤 출연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서민정씨.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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