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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장애인들. 자동차 내부 부품을 임가공하고 있다.
ⓒ 이진희

"일하고 싶다. 자립하고 싶다. 그리고 일할 수 있다."

장애인들의 욕구 1순위는 '근로 욕구'다. 이는 보건복지부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을 통해 실시한 '2005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다. 자립할 기회를 만들고 싶다는 뜻이다. 또한 장애인복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직업 재활'을 장애인 복지의 핵심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직업을 찾고 노동하는 것은 자립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는 일상생활과 사회에 적응하는 훈련의 의미도 내포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천안 장애인 수는 1만 이상, 직업재활 기관은 단 두 곳

천안 제조업체 중 8.6%만 장애인 고용
법은 있으나 정부는 안 지키고 기업은 외면

정부는 이미 16년 전 '장애인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300인 이상 기업은 근로자의 일정 비율을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한 제도였다. 2004년엔 50인 이상의 사업주들부터 강제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법을 발의·제정한 정부조차 2% 이상의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장애인 고용업체에는 다양한 '당근'도 제시됐지만 기업인들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지역의 현실은 더 열악하다.

(사)한빛회는 지난해 11월 15일부터 12월 30일까지 천안지역 제조업 관련 업체 805곳의 장애인 고용현황을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는 단 73곳(8.6%)에 불과하다. 이 중 42개 업체는 단 1명만 고용하고 있다. 5명 이상 고용한 업체가 5곳, 10명 고용한 업체가 1곳, 13명을 고용한 업체가 2곳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상시 근로자 수를 살펴보면 50인 이하 업체에서 전체의 56%를 고용하고 있다. 소규모 업체가 장애인 고용에 앞장서고 있는 셈. 300인 이상 기업 중 장애인을 고용한 곳은 6곳뿐이다.

향후 채용 계획과 관련, 장애인이 일하고 있는 사업장 중 채용계획이 있는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는 각각 29%였다. 그러나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은 사업장 중 채용 계획이 있는 업체는 5%에 불과했으며 72%는 장애인 채용계획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 이진희 기자
천안시의 경우를 살펴보자. 2005년 12월말 현재 천안시에 등록된 장애인 수는 1만6149명이다. 2004년(1만4329명)보다 13%, 2003년(1만2337명)보다 23% 증가했다. 이러한 천안시 통계대로라면 장애인은 전체 인구의 3% 정도지만 장애인 단체들은 시 전체 인구의 10% 정도가 장애인일 것으로 본다. 비등록 장애인들이 많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장애인 직업 재활을 돕는 기관은 '천안시 장애인 보호작업장'과 '죽전직업재활원' 등 단 두 곳에 불과하다.

2004년에 설립된 장애인 보호작업장은 (사)한빛회가 위탁운영하는 '보호작업시설'이다. 정원은 40명이지만 지금은 17명이 일하고 있다. 근로의욕은 있지만 장애 때문에 일반사업장에 고용되기 어려운 성인장애인(18세 이상)들이다.

조화로 만든 화환, 압화, 포프리, 열쇠고리 등 장식품을 생산하고 자동차 헤드레스트 커버, 볼펜 등도 가공한다. 이들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제자리에 앉아 일에 집중하는 등 무척 진지하게 근무하고 있다.

이달 7일 만난 장혜진 직업교육 교사는 "일반 회사와 강도는 다르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름의 소속감과 책임감을 키워가는 것 같다"고 말한 뒤 "장애인들이 단체생활을 통해 사회성도 키우고 의사표현력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거리는 즐거움"... 장애인의 공공사업 참여 확대, 제도적 보장 필요

▲ 일이 있다는 것은 부담이 아닌 즐거움 자체, 돈 때문이 아니라 일이 주는 재미가 이재원씨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 이진희
한 자리에서 일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의 나이·경력·장애 정도는 제각각이다. 각자의 사연도 다양하다.

설립 때부터 일한 황필현(32·지체장애 3급)씨는 직장 경력이 화려한 편이다. 제약회사에서는 사슴뿔을 분류했고, 마늘 공장에서는 불량품을 솎아냈다. 맨홀 뚜껑을 만드는 회사에서도 일을 해봤다.

그러나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자꾸 넘어지는 편이어서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할 수가 없었다. 일반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사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다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낙천적인 황씨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황씨는 편안한 작업장 분위기에 다시 잘 적응해 가고 있다.

예쁜 화환 만들기가 주특기인 이재원(51·지체장애1급)씨는 오른쪽 팔만 겨우 움직일 수 있다. '몇 개월만 다녀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을 어느덧 1년 반째 하고 있다.

이런 이씨도 예전에는 20년 넘게 방에서만 지내며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건 6년 전이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무기력하고 사람들을 피하려고만 했던 이씨는 이제 성취감을 느끼며 보람도 찾아가고 있다.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이씨에게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다. 일거리가 주는 재미가 이씨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셈이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그야말로 감개무량했죠(웃음). 12만원에 불과했지만 제가 만져봤던 돈 중 가장 큰돈이었어요. 그 돈으로 그동안 고생하신 어머니께 영양주사를 놔드렸어요. 저를 아는 주변 분들도 웃으시면서 '이제 돈 버니 한턱내라'며 농담하곤 했죠." 이씨가 여전히 따뜻하게 안고 있는 추억이다.

2001년 2월 만들어진 죽전직업재활원(죽전원)은 노동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일반사업장에 취업이 곤란한 중증장애인을 훈련·교육하기 위한 '작업 활동 시설'이다. 현재 일하는 이도 40명이 넘는다. 죽전원은 청원(예농작업부), 크린텍(임가공사업부), 화토(도자공예부) 등으로 나눠 직업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이상익 원장은 "장애인의 경제활동은 삶의 질을 스스로 높일 수 있다는 꿈을 키울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운영비용이 많이 드는 '복지모델'로는 한계가 있다는 게 이 원장의 판단.

복지와 보건, 복지와 고용, 복지와 환경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 일반적인 영리기업보다는 공공성이 더 필요한 사업, 즉 보건·고용·환경 사업에 장애인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예컨대 재활용쓰레기 분리작업, 공공화장실 관리사업 등이 이에 해당된다.

▲ 죽전직업재활원 가족들과 재가장애인 중 직업훈련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죽전원에서 함께 노동하며 저마다 꿈을 키우고 있다.
ⓒ 이진희

'직업 재활', 자치단체 장애인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

장애인의 생활수준은 비장애인보다 훨씬 열악하다. 장애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도시근로자 가구 평균 소득의 52%에 불과하다. 또한 장애인 가구 10곳 중 1곳(전국적으로 26만 가구)의 소득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립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장애인 노동권을 인정하고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천안시 경우만 보더라도 장애인 노동권 보장을 위한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다.

2006년 천안시의 일반회계 예산 중 사회복지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7% 정도다. 금액으로는 약 917억원이다. 그 중 기초생활보장 등 빈곤·실업 관련 예산이 약 28.6%로 가장 비중이 높으며 노인복지(22.9%), 보육(20.7%) 순이다. 장애인 부문은 세 번째 규모인 11.7%로 107억여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물론 천안시도 장애인 복지사업을 위해 장애인 종합복지관, 장애인 실내체육관, 장애인 보호작업장 등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동권 확보를 위해 장애인 콜택시 및 이동봉사차량 운영, 전동휠체어 보급을 추진했다. 저소득층 지원 사업, 장애인 복지수당 지급, 생활시설 운영비 지원 및 지도 업무 등을 펼쳤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내실보다 외양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지역의 사회복지 전문가들도 그간 부족했던 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직업 재활 및 고용 확대, 장애아동 교육권 등 실질적인 부분에 더욱 노력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5ㆍ31 지방선거 복지천안을 위한 네트워크'(복지천안 네트워크)는 최근 장애인 노동권 확보를 위해 '장애인 직업지원개발센터'를 시급히 개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복지천안 네트워크는 지역 대학의 사회복지학과 교수 11명과 19개 사회복지단체로 이뤄져 있다.

직업지원개발센터에서 ▲장애인의 직업능력 개발을 위한 훈련 지원 ▲장애유형에 따른 취업 범위 다양화 ▲장애인 욕구조사를 바탕으로 한 직장소개 및 사후관리 ▲기업·기관을 대상으로 한 인식개선 프로그램 운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 직업 재활을 도입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직업 재활'이 장애인 자립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점에서 자치단체의 장애인 정책도 이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쟤 장애진단 다시 받아봐야 하는 거 아냐?"
[인터뷰] 음식점 누비는 '정신지체 1급' 윤성근씨

▲ 약 3년 전부터 충남 천안시 쌍용대로변의 대형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는 윤성근씨.
서빙은 식당에서 제일 바쁜 일이다.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불러대기에 정신없이 일해야 하는 자리다. 챙겨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비장애인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바로 서빙이다.

그런데 충남 천안시 쌍용동 H음식점에서 서빙일을 하는 윤성근씨(27)는 장애인이다. 윤씨는 정신지체 1급이다. 그러나 윤씨는 비장애인 못지않게 음식점을 누비며 서빙일을 척척 해낸다.

윤씨는 3년 전부터 이곳에서 일했다. 죽전직업재활원 '화토'(도자공예부)에서 조용조용 일하던 그는 죽전원장의 소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 갈빗집의 직원이 됐다.

윤씨가 들어오면서부터 바로 서빙일을 한 건 아니다. 처음에는 손님들이 벗어놓은 신발을 닦고 정돈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하지만 일이 손에 익으면서 윤씨는 사업주의 눈에 들었다. 드디어 작년 10월부터 윤씨는 서빙일을 하게 됐다.

정신없이 바쁠 때는 장애인인 윤씨에게 서빙일을 맡기는 게 불안하진 않을까? "성근이요? 잘하죠. 자기 일인 양 열심히 일하는 게 눈에 보여요. 숫자 개념만 조금 더 좋아졌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하하." 점장의 말이다.

동료들은 윤씨가 일하는 모습에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차이를 못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쟤 장애 진단 다시 받아봐야 하는 거 아냐"라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단다.

윤씨도 이전에 했던 일보다 지금 하는 서빙일이 훨씬 맘에 든다. "예전에 구두 닦을 땐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곤 했어요. 서빙일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아침 8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일과지만 윤씨는 성실하게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얼른 돈 많이 모아서 차도 사고 집도 사고 싶어요." 윤씨의 바람에서 건강한 삶의 의지가 진하게 묻어나온다. / 이진희 기자

덧붙이는 글 | 바른지역언론연대 회원사, 천안아산 주간지역신문인 충남시사신문 408호에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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