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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철
가끔은 무작정 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잘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황토가 있는 작은 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걷다가 논두렁 길이나 밭두렁 길을 만나면 더없이 정겨운 마음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내려보면서 내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걷다가 우연히 푸른 보리밭을 만나 푸른 마음을 키우고 싶다. 푸른 파도가 살랑거리는 물결 사이로 곱디고운 유채꽃이 나비처럼 나는 초원을 걷다 보면 둘이 아니어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혼자라도 황토가 내 발길을 다독여주고 푸른 보리가 내 마음을 맞이해주면 그걸로 난 행복에 빠질 것 같다.

ⓒ 재철
보리밭 하면 꼭 생각나는 게 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다. 그땐 대부분 농가에서 보리를 심어 4-5월이면 들녘이 온통 푸른 물결로 넘실거렸다. 쉬는 날이면 우리 꼬맹이들은 그 보리밭 속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찾곤 했다. 종달새 알과 달롱개(달래)였다. 보리밭 속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는 달롱개를 꼬맹이들은 눈을 부릅뜨고 찾아다녔다. 그렇게 보리밭을 뒤지다 우연히 마주한 게 있다. 종달새다.

갑자기 종달새(노고지리) 한 마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그 부근에 분명 종달새 알이나 새끼가 있다는 징표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어미종달새는 두려움에 가득 찬 소리로 울부짖으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런데 종달새의 날갯짓과 이동은 일반 새들과 달리 좀 특이했다.

다른 새들은 요리조리 움직이며 나는데 종달새는 하늘과 땅을 수직으로 오가며 날갯짓을 해댔다. 우리는 종달새의 그런 움직임에 더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고 새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도 어미새의 안타까운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드센 개구쟁이 녀석이 알이나 새끼를 찾으려 하면 못 가게 팔을 잡아끌기도 했다.

'야! 저 종다리가 너그 엄마라면 어떡허것냐? 자 봐라. 지 새끼 우리가 건드릴까봐 저렇게 소리 지르고 있잖아. 그니까 그냥 가자.'
'아까분디. 알이라면 깨서 먹으면 그 맛 참말로 고소헌디. 아깝다 아까워.'
'임마 아깝기는 머시 아까워. 잔말 말고 달롱개나 캐러 가자고.'

그러면 그 친구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자꾸 종달새가 오르내리는 보리밭 근처를 돌아보곤 했다. 그렇게 달롱개를 한 주먹씩 캐어 그냥 물에 씻어 씹어 먹기도 하다 피곤하면 보리밭에 벌렁 누워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하늘은 뭉게구름과 조각구름이 푸른 하늘 사이를 춤추듯 노닐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눈꺼풀이 내려앉으면 가는 코를 골며 잠들기도 했다.

푸른 보리밭 사이로 피어난 유채꽃
푸른 보리밭 사이로 피어난 유채꽃 ⓒ 재철
어느 땐 너무 잠을 많이 자 노을이 서편 하늘에 아름답게 수놓을 때에 일어나기도 했다. 그때의 보리밭은 밭이 아니라 꿈의 안식처였고 포근한 쉼터였다. 일어나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꼭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모님의 가난도 그땐 보이지 않았고 평화로움만이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유년의 푸른 보리밭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 남아 숨 쉬고 있다.

지금 봄이 춤추고 있다. 4월의 봄은 화려하다. 겨우내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이 촉촉한 대지의 젖을 먹으며 피어나고 있다.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 꽃 소식이다.

그러나 꽃 소식 속에서도 농촌에선 푸른 보리의 싱싱한 희망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쌀개방으로 인한 수입쌀이 들어오면서 농민들의 한숨소리가 밀려오고, 평택 대추리에선 농사를 짓고 살고 싶다는 농민들의 안타까운 비명이 들려오고 있다. 그 한숨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천형을 앓다가 간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불며>라는 시가 마음 따라 흐른다.

ⓒ 재철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 )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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