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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인 강은교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이 도서출판 창비에서 나왔다. 강은교 시인은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고, 1971년에 첫 시집 <허무집>을 펴냈다.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시 '우리가 물이 되어'가 수록된 첫 시집 <虛無集>(칠십년대동인회, 1971)과 시선집 <풀잎>(민음사, 1974)을 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은 "우리 시사에서 유례없는 치열한 허무(虛無)에의 탐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 강은교 시집-초록 거미의 사랑
ⓒ 이종암
여성 시인이 그리 많지 않던 1970년대 젊은 시인 강은교가 시단에 불러일으킨 활력은 대단했다. 유한자인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종교적 차원을 초월하여 그려낸 그의 초기시가 거느리고 있는 허무의 배음(背音)에 많은 독자들과 시인 지망생들이 스스로 감염되고 기대면서 어두운 한 시절을 건너갔다.

당시 강은교 시에 나타난 짙은 허무 의식은 결혼 초기에 갑자기 찾아온 병마(病魔)와 아이의 죽음, 아버지의 부재라는 개인적인 체험과 자유가 억압되던 독재정권이라는 부정적인 사회 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모순 되고 불평등한 사회에서의 여성적 삶은 이중적인 억압체제에 놓일 수밖에 없는데, 첫 시집에서부터 그가 선보인 연작시 '비리데기 旅行의 노래'는 당시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절망과 허무를 뚫고 나아가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비리데기 혹은 바리데기는 버림받은 여자가 온갖 어려운 고난을 뚫고 사회(부모)를 구원한다는 무속 설화의 여자 주인공이다. 바리데기 여인은 그의 시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존재와 역사(사회)에 드리워진 어둠을 걷어내겠다는 치열한 시인 의식의 실천으로 보인다.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에서는 그 '바리데기'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어둠의 심연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불특정 다수로 나타난다. 그것은 시의 부제로 표현되고 있는 '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 '심연에 비추는 풍경'이라고 이름 붙여진 연작시들이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동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 '너를 사랑한다'전문.


시의 끝 행 "너를 사랑한다"는 시인의 목소리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 시인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씀 "너를 사랑한다"가 한없이 크게 들려온다.

나는 강은교의 열한 번째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의 독후감을 '사랑의 뿌리에 바치는 노래'라고 명명한다. 어둠의 심연 속에 갇혀있는 너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노래다. 인용한 위 시에서 너라는 대상은 분명하지 않다. 아니다. 시집을 펼쳐들면 분명한, 수많은 '너'가 보인다. 너는 엄마 배속에서 눈도 뜨지 못하고 버려진 수많은 아기씨들이며, 정신대 원혼들이며, 고 김선일씨이며, 힘없이 죽어간 가야국의 청년이며, 전쟁과 기아로 죽어간 수많은 넋들이며, 인간의 욕망으로 야기된 환경 파괴로 죽어나간 뭇 생명들이다.

강은교 시인은 이 세상에 와서 억울하게 죽어간 넋들을 위한 '헌화가'를 부르는 시대의 무당이 되기를 자청한다. 시집 속에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시행 "아야아"는 억울하게, 고통스럽게 죽어간 생명의 비명소리이며, 시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고통의 소리이다. 우리는 그의 시집을 읽으며 그 고통의 소리에 동참을 해야 한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어둠의 심연에 갇혀있는 원혼들을 불러내어 위무하고, 살아있는 우리들에게는 생명과 평화의 새 길을 가자고 한다. '2004년 12월'이라고 쓴 날짜를 밝히고 있는 시에서 그는 기꺼이 생명의 새날을 여는 무당이 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다음 그의 시집이 벌서 기다려진다.

열어주소서열어주소/이말문열어주소서/남해용왕님북해용왕님/동해용왕님서해용왕님/쓰다듬으소서내말문/출렁이소서내말문/-(중략)-/워어이워어이/쓰다듬으소서내말을/출렁거리소서내피를. - '사랑의 뿌리에 바치는 굿시'부분.

초록 거미의 사랑

강은교 지음, 창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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