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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주진 기자) '세상을 움직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새 총리 후보로 내정된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의 캐치프레이즈다. 이 캐치프레이즈에는 문학소녀에서 여성운동의 대모, 여당의 중진급 정치인이 되기까지 그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 신의가 있고 정직한 사람, 주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재야운동의 스승, 강원용 목사는 "군사독재 시절 혹독한 시련을 당하면서도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며 오뚝이처럼 살아왔다"고 그를 떠올렸다.

70년부터 민주화·여성운동 이끈 개혁주자

한 의원은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이끌며 가족법ㆍ남녀고용평등법ㆍ성폭력처벌법 등의 제정에 앞장서는 등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재야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다. 또한 여권 내 여성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풍부한 국정 경험과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 의원은 1944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다섯 해를 그곳에서 살았다. 전쟁이 나자마자 부모님은 몇 달만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믿음으로 집안의 전 재산을 고향땅에 묻어둔 채 자식들을 데리고 월남했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은 50년의 세월을 훌쩍 넘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분단의 한을 보고 느끼며 자라왔기 때문에 내가 통일·평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술회했다.

그는 대학 3학년 때까지 자신의 말처럼 '보들레르와 베를렌을 읊조리는 불문학도로 꿈만 먹고 살던 문학소녀'였다. 그런 그가 재야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이대-서울대 연합서클인 '경제복지회'에서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키다리 아저씨'는 이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운명이었다.

졸업하던 해 1967년 결혼했지만 6개월이라는 짧은 신혼의 추억만을 남기고 남편은 그의 곁을 떠났다. 신영복 교수와 함께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 수감됐기 때문.

"사람의 눈물이 마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죠. 차디찬 감방에서 젊은 꿈을 사장당하고 있는 남편을 위해서라도 두 사람 몫의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한 총리 후보는 1974년부터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 여성분과 간사를 지내며 소외계층 여성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그 역시 1979년 아카데미 교육생들에게 용공교육을 시켰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오랜 생이별 끝에 1981년, 한 의원은 광복절 특사로, 남편은 13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스물일곱 청년의 모습으로 헤어졌던 남편은 마흔한 살의 중년이 되어 나타났어요. 저 역시 스물네 살 새색시에서 중년을 바라보는 서른일곱의 아낙이 되어 있었죠."

남편과 뒤늦은 신혼생활을 시작한 한 의원은 1985년,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첫 아들을 낳았다. 한 의원 부부에게 아이는 "고난에 찬 삶에 하느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됐다. 부부는 아이 이름을 '길'이라 붙였다. 하지만 호적상 이름은 '한길'이다. 부모의 성을 함께 사용하지 못하게 한 호적법 때문에 아이 이름은 '박한 길'에서 '박 한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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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박성준 교수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부인 한 의원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한 사람이 자신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회지도자로 단련되고 발전되어 가는지 보여준 사람"으로 아내를 평가하며 남다른 존경을 표했다.

오랫동안 여성운동에 몸담아온 한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현실정치에 입문했다. 재야운동 시절부터 김대중·이희호 부부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한 의원은 1995년 김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부터 입당을 권유받았지만, 당시 남편과 함께 일본에 체류하고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녀고용평등법 등 굵직한 사안 법제정 앞장

그 후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전국구 의원으로 16대 국회에 입성했다. 김대중정부 시절엔 초대 여성부 장관으로 발탁됐고, 이어 노무현정부의 초대 환경부 장관도 지냈다. 지난 17대 총선 때는 경기 일산갑 선거구에 출마해 국회 부의장을 지낸 5선의 홍사덕 전 의원을 꺾는 뚝심을 발휘해 스스로 '6선 의원'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지난해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때는 여성단일후보로 상임중앙위원 선거에 출마, 지도부에 진입했다.

한 후보는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하다. '깊은 물에 큰 배가 뜨듯' 넓은 포용력과 균형감을 갖춘 리더십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인 조정 능력도 돋보인다. 함께 재야운동을 했던 김근태 최고위원과 친분이 깊지만 정파, 계파를 떠나 여야 모두에서 신임이 두터운 것도 큰 강점이다.

소신과 실용을 넘나드는 유연함도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안 공동발의, 쌀협상 비준안 찬성 등 첨예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때론 소신을, 때론 실용을 내세웠다. 부처 장악력이나 업무 추진력 면에선 단호하다는 평가다. 여성부·환경부 장관 재임 시절, 저녁 회식을 줄이는가 하면 직원들을 직급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대우해 눈길을 끌었고, 해당 과로 직접 찾아가 직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보고를 받는 모습으로 '탈권위'의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줬다.

한 언론사가 뽑은 '장관 리더십평가 1위'에 올랐고, 환경부를 '정부업무평가 최우수부처'로 만들기도 했다.

17대 총선 출마 당시 그는 "오랫동안 국정운영의 중심에서 경륜을 쌓은 만큼 저를 여성으로 한정짓지 말고, 한 나라를 책임질 큰 정치인으로 봐 달라"고 주문했다.

"겨울이 주는 시련이 없다면 봄날의 화려함도 없다"며 겨울의 매서움을 잊지 않도록 늘 자신을 채찍질하는 겸손함이 오늘의 그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

"부드러운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처럼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국정 현안을 새 총리가 어떻게 돌파해나갈지 국민들이 거는 기대가 크다.

한명숙 총리 후보가 걸어온 길

▲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 한국신학대학교 선교신학대학원 신학석사
▲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대학원 여성학 석사
▲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구속 수감
▲ 한국여성단체연합 가족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
▲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 제16-17대 국회의원
▲ 여성부 장관
▲ 환경부 장관
▲ 한국아동'인구'환경의원연맹(CPE) 회장
▲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 열린우리당 국정과제추진특별위원회 회장
▲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 열린우리당 당혁신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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