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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운명이다. 그 운명이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온 것이 아닌가? 어쩌면 앞으로 더 장대한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때문에 쉽게 낙담할 이유가 절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배에서 버텨나가며 일본으로 향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적은 양의 물과 음식으로 버텨야 한다. 널빤지 하나로 버텨 오던 때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지지 않았던가?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다. 물이 비록 많다하나 오래 버티다 보면 썩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맨 앞에 있는 나무통의 마개를 열고 물맛을 보았다. 유황 냄새는 나지 않았다. 보통 오랫동안 항해를 하게 되면 물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황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이 물통에 든 물에는 유황냄새가 나지 않았다. 언제 물을 채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물이 썩을 가능성이 많았다.

왕신복은 급히 그 옆의 물통을 열었다. 두 손으로 물을 훔쳐 마시다가 흠칫 놀라 입에 든 것을 뱉고 말았다. 물통에 든 것은 놀랍게도 술이었다. 그 옆의 물통도 확인하자 역시 그 물통에도 술이 들어 있었다.

이럴 수가….

왕신복은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방에 든 네 통의 물통 중 두 통에 술이 든 것이다. 쌀로 빚은 양곡주였다. 그나마 물이 든 통에는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정도 물이라면 아무리 아껴 마셔도 며칠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그 옆에 있는 식량도 얼마 남아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신복은 허탈한 심정으로 주방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단 이 배에 올랐지만 확실히 목숨을 구했다는 보장은 아직 없었다. 배의 돛이 불에 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데다가, 식량과 물마저 며칠이 지나면 바닥이 날 것이다. 다른 배를 만나거나 육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영락없이 굶어 죽게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갈증이 더 느껴졌다. 그는 손으로 물을 움켜 입술만 약간 적셨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물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최대한 버텨야 하는 것이다. 입이 물맛을 보자 오히려 더한 갈증이 생겨났다. 왕신복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항해를 하는데 물 대신 술을 더 많이 실어놓은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약간의 술을 실을 수는 있다. 하지만 물은 목숨과 같은 것이다. 목숨과 같은 물은 조금만 실어 놓고, 그 보다 술을 더 많이 준비한 게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선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배를 급히 떠난 선원들이 물통을 가져갔다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물통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아서는 그렇게 많이 가져간 것 같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두통의 물을 더 가져갔을 뿐이다. 그러면 이 배는 긴 항해보다는 짧은 항해를 위해 움직였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었다.

짧은 항해라… 신라배가 동해를 항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본과 교류를 하지 않는데다가 동해의 수심이 깊고 파도가 거세 항해를 꺼리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큰 배가 약간의 식량과 물을 싣고 항해를 한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물로 입술을 적신 그는 옆의 포대에 담긴 찐 살을 한 움큼 손으로 집어냈다. 찐 살은 오랫동안 변질되지 않고 그 부피도 작아 항해에 필수적으로 이용하는 식량이었다. 왕신복은 그 찐 살을 입에 넣고 침과 함께 아주 천천히 씹어 넘겼다. 하지만 허기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한 움큼의 쌀을 더 먹기로 했다.

다시 포대를 열어 손을 집어넣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쌀의 양이 줄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은 방금 겨우 한 움큼의 쌀만 먹었을 뿐이다. 다시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생명을 이어줄 중요한 식량이기 때문에 그 양을 자세히 점검했었다. 약간의 쌀이 없어진 게 분명했다. 누가 이 쌀을 가져갔다 말인가?

왕신복은 침착하기로 했다. 쓸데없는 망상은 하지 말고 사태를 냉철하게 분석해보자. 이 배에 사람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 있었다면 이틀을 꼬박 갑판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또한 그는 이 배를 뒤져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정말로 유령선이?
그럴 리는 없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한 가지 떠올랐다. 이 배에 사람 말고 다른 존재라면 쥐나 다른 동물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쥐일 가능성이 많았다. 이렇게 큰 배는 육지에서 건조하면서부터 쥐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배가 출항을 하면 영리한 쥐들이 주방부터 찾아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쌀을 훔쳐간 놈은 쥐일 것이다.'

왕신복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일방적이고 성급한 판단이었지만,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올리기 싫었다. 그는 찐쌀이 담긴 쌀자루를 단단히 매듭지어 묶었다. 그 옆의 물통도 뚜껑을 확실히 닫아놓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다시 물통 뚜껑을 열어 물이 차 있는 곳에 손톱으로 흔적을 남겨놓았다.

다시 갑판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먹물 같은 어둠이 바다에 깔리고 있었다. 아직 달이 떠오르지 않아 갑판 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바다 주위의 모습도 보이지 않은데다 파도까지 잔잔하여 마치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먼 지평선을 눈앞에 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떠나온 발해는 그 영토가 광대하여 지평선을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었다. 문득 떠나온 발해. 그중 자신이 살고 있던 상경용천부가 그리워 왕신복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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