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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재벌)에게 생선가게(은행)를 맡기면 안된다."
"아니다, 길을 잘들이고 감시를 하면 괜찮다."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분리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의 유사은행 설립추진을 놓고 반대여론이 높다. 금융-산업자본(금산) 분리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최근 지방 은행가 모임에서 월마트의 은행업 진출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법률적인 허점으로 인행 산업자본이 은행과 유사한 금융업을 할 수 있게 됐다"면서 "이런 허점은 산업자본과 은행을 분리해야 한다는 (미국) 의회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월마트의 산업대출회사 논란... '법률적 허점' 개정 추진 중

미국은 철저한 금산분리 원칙을 지키는 대표적인 나라다. 미국은 글래스-스테갈(Glass-Steagall)법 등에 의해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반대로 은행이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은행지주회사법은 은행이 비은행의 주식을 5% 이상(무의결권 주식은 15%까지) 보유하거나 비은행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월마트는 현재 유타주에서 인더스트리얼론컴퍼니(Industrial loan Company,ILC) 설립을 추진 중이다. ILC는 은행업무 중 일부만 수행한다. 월마트는 신용카드 업무비용을 줄이기 위해 관련 업무만 수행하고 일반 예금 및 대출업무는 하지 않는 은행 설립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ILC는 현행 미국법상으로는 은행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유타주에서만 35개 이상의 ILC가 영업 중이다. 버냉키 의장이 법률적 허점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를 가리킨 것이다. 이미 민주당 출신의 두 의원은 산업자본이 ILC를 세울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상당수 선진국들에서는 일반적으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분리되어 있다. 법·제도적으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엄격하게 금지하거나, 명시적으로 금지규정이 없는 경우에도 오랜 경험을 통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 관행이 정착되어 있다. 금산분리 원칙을 어느 금융기관까지 적용하느냐는 나라마다 약간씩 다르다. 하지만 금융시장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예금 및 대출업무를 하는 은행은 거의 예외가 없다.

[한국] 은행장들이 앞장서서 금산분리 철폐 주장

지난 3월 17일 한국 금융산업을 대표하는 은행장들이 한국은행 초청으로 이뤄진 금융협의회에서 금산분리 원칙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소식이 놀라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회의에는 국민·우리·하나·조흥·외환·한국씨티와 같은 민간은행장과 산업, 기업과 같은 국책은행장들이 다수 참석했다.

멍석은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깔았다. 박 총재는 이미 며칠 전 금산분리 원칙을 보완하거나 폐지하는게 좋겠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한 말씀들 해보시라"는 박 총재의 권유에 은행장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했는데, 금산분리 원칙 폐지에 명백히 반대한 사람은 하영구 한국시티은행장 뿐이었다고 한다.

하 행장은 "현행 4%로 되어있는 산업자본의 은행 주식 취득한도를 다소 상향조정하는 것은 몰라도 산업자본이 은행의 경영권을 지배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다른 은행장들은 "산업자본(재벌)의 금융산업 진입을 허용해도 크게 우려할 상황이 아니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낡은 족쇄 금산분리, 조속히 폐지해야" "국내기업 역차별 금산분리 폐지해야"라며 신이 나서 나팔을 불어댔다. 경제야 망가지든 말든, 경제원칙에 어긋나든 말든, 재벌 주장을 충실히 대변해온 보수언론들이 그러는 것은 늘상 보아온 것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은행장들이 금산분리 원칙 흔들기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제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금산분리 원칙을 지키는 이유는 몇가지가 꼽힌다. 우선 산업자본이 소속 금융계열사를 이용해 지배력을 유지·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재벌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특히 이런 위험성이 높다. 재벌총수들이 4% 안팎의 적은 지분만 갖고도 수십개 계열사들은 모두 지배할 수 있는 '비결'은 계열사간 순환출자에 있다.

가공자본을 양산하는 순환출자는 후진적 소유지배구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특히 재벌의 금융계열사를 이용한 순환출자는 금융기관에 맡겨진 고객돈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금산분리는 금융회사가 대주주의 사금고로 전락하는 것을 예방하려는 목적도 있다.

금산분리 원칙은 시장경제 원리와 직결

금산분리 원칙은 시장경제 원리와 바로 직결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금융회사의 핵심기능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다. 은행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기업에게 대출을 해준다. 대출을 해준 뒤에도 지속적으로 감시를 한다. 기업에 부실징후가 보이면 즉시 대출금을 회수한다.

부실기업은 시장에서 바로 퇴출된다. 이것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시장에 의한 상시적 구조조정'이라고 말한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것도 은행 등에 의한 이런 상시적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회사들이 관치와 재벌체제의 폐해 속에서 본래의 기능을 못한 것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성향적 차이에 상관없이 금산분리 원칙에 대해 동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금산분리 원칙을 시행 중이다. 특히 은행의 경우 일반적으로 의결권 있는 주식의 10%까지 취득이 가능하지만, 산업자본의 경우는 은행주식을 4%까지만 살 수 있다.

심지어 공정거래법의 재벌규제에 대해 '무조건 반대'를 외쳐온 전경련조차 은행에 금산분리 원칙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껏 명시적으로 이의 제기를 못해왔다.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금산분리 원칙을 부정하는 극소수 경제학자들을 향해 "1%도 안되는 사이비 학자들"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실제 산업자본에게 은행을 넘겨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것이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이다. 기업을 감시해야 할 은행의 지배권을 기업에게 넘겨주자고 주장하는 은행장들이 과연 제정신이 있는 사람들인가? 한 금융학자는 이를 두고 "가장 반시장적이고 자본주의를 깨는 행위"라고 개탄했다.

은행장들이여, 진정 제정신인가

은행장들은 금산분리 원칙 폐기의 이유로 외국자본 문제를 꼽았다고 한다. 국민경제의 혈맥인 금융산업이 외국자본의 손에 넘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벌의 금융지배를 용인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다. 국내 은행산업에서 외국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고민하고 방책을 마련할 일이다.

문제가 있어도 외국자본보다는 재벌이 낫다는 은행장들의 주장은 위험 천만이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바로 8년 전 외환위기를 겪으며 관치와 재벌체제 개혁을 다짐했던 일이 있었던가, 의문이 들 정도다. 은행장들은 기업경영의 투명성이 높아지고 금융감독 기법이 갈수록 발달하고 있는 점 등을 들며,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폐해는 제도적으로 방지하면 된다는 주장을 내놨다고 한다. 일견 일리있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금융전문가들은 손사레를 친다. 산업자본이 금융을 지배하더라도 평상시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일이 터지는 것은 결정적일 때, 즉 산업자본의 목숨이 달렸을 때이다. 이 때는 죽기 살기로 위법을 저지르게 된다. 금융감독기관의 사후 조처는 이미 의미가 없다.

1990년대 말 터진 대우사태는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하던 국가경제를 또다시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당시 대우 계열의 금융회사들은 부실발생을 예견하면서도 막대한 규모의 대우채권을 인수했고, 결국 그것은 모두 국민 부담으로 전가됐다. 엄하게 훈련받은 고양이라면 생선가게의 생선을 마구 훔쳐먹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명한 생선가게 주인이라면 원천적으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재벌이 "생선가게(은행)를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것에 적극 반대해야 할 은행장들이 동조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하기야 그런 주장을 선도한 장본인이 중앙은행 총재이니 더욱 할 말이 없다.

'한국의 그린스펀'을 기대하는 국민들만 애처로울 뿐이다. 그런 사람들을 믿고 어떻게 은행에 돈을 맡기고, 한국 금융산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에는 진정한 뱅커들이 없다는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곽정수 기자는 현재 한겨레신문 대기업 전문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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