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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잠이 깨어 슬쩍 눈을 떴는데 단순한 바다풍경에 변화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떠 바라보았는데도 여전히 그 모습이 시야 가득 밀려왔다. 잠이 확 달아났다.

이럴 수가……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정신이 몽롱한 상태라 지금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눈을 비볐지만 분명 커다란 배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의식을 믿지 않고 있었다. 허기와 갈증이 극에 달해 헛것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널빤지가 배의 이물에 부딪혔을 때에야 비로소 눈으로 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만져보자 분명 참나무의 결이 느껴졌다. 배가 분명했다. 그 배 한쪽에는 기적같이 밧줄까지 달려 있었다. 그는 널빤지에 몸을 의지한 채 밧줄 있는 곳까지 저어갔다. 자신이 처해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 그의 힘을 북돋웠을 테지만, 그는 자기에게 소리지를 힘이 남아 있는지, 피멍을 들이면서 살 속을 파고드는 밧줄을 타고 오를 힘이 남아 있는지 가늠하려고 애썼다.

널빤지는 바로 배의 갑판 아래까지 왔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려 균형을 잡고 널빤지 위에 올라섰다. 밧줄은 그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힘껏 위로 뛰어올랐지만 밧줄을 잡을 수 없었다. 대신 바닷물에 첨벙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모든 힘을 다 모아 다시 널빤지 위에 올라갔다. 그는 널빤지를 배에 바짝 붙여 최대한 손을 위로 뻗쳐, 그 상태에서 힘껏 뛰어올랐다. 밧줄 끝이 그의 한쪽 손에 잡혔다. 힘을 주자 그의 몸이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국이 되었다.

문득 이 밧줄이 생명 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조금씩 올라 이윽고 갑판 위로 기어오르고, 난간을 따라 기어가다가 선원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다 어둠 속에서 본능적으로 물통으로 발견하고 상반신을 물통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배가 터지지 않을 만큼 마시고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멀리서 희미하게 울리던 북소리가 느닷없이 가까워지면서 귀청을 때렸다.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두들겨대는 북소리였다. 상황이 다급함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왕신복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뱃길을 떠난 지 일주일.

처음 배에 올라탄 그는 지금까지 줄곧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식사는커녕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모두 게워 내고 있었다. 생강이며 생 쌀알, 그리고 삼뿌리를 씹으면 멀미를 덜하다고 하여 부지런히 입을 놀렸으나 그다지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틀째 미음 한 술만 겨우 뜨고는 겨우 잠을 청했는데 느닷없이 북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왕신복은 일어나 의관을 정제했다. 그는 이번 사절단의 총책임을 맡은 정사(正使)가 아닌가? 지엄한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의관을 갖추고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양태사가 선실로 후닥닥 들어왔다.

"좌윤 어른! 얼른 몸을 피하십시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밖에서는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해적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배에 바짝 붙여 이미 선실로 난입했습니다."

"그러면 막아야 하지 않는가?"

왕신복은 선실 벽에 걸린 검을 꺼내들었다. 비록 문관이긴 하나 어릴 적부터 닦아온 그의 검술 솜씨는 웬만한 장수 못지않았다. 칼을 빼들고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양태사가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얼른 길을 비켜라."

"우선 몸을 피하십시오. 저들은 잔혹 무도한 해적들입니다. 우리의 세력으로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보통 일본으로 떠나는 사절단의 규모는 클 때는 200명 가까이 승선할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절단은 그 규모를 대폭 줄여 고작 23명만이 노오트 호에 승선했다. 더구나 문관인 자신이 사절단을 총 책임지고 있어 무관의 숫자도 턱없이 부족했다. 칼을 잡아 본 적이 없는 관리와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해적에게 당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 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빠른 시일 내에 일본으로 향해야 한다. 일본에 가지 못하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왕신복은 양태사를 밀치고 선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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