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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2월 22일자에서 삼성이 헌납을 약속한 8000억원의 용처와 관련 정부가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논지의 제목을 뽑아 눈길을 끌었다.
"삼성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합니다."

최근 삼성 구조조정본부 고위임원이 당혹스러운 듯이 털어놓은 말이다. 삼성이 지난 2월 7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뒤 일부 보수언론들이 삼성 구조본에게 직접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금산법이나 금융지주회사법, 공정거래법 등을 놓고 삼성이 정부와 싸우고 있을 때 편을 들어 주었는데, 삼성이 갑자기 잘못했다며 사죄하고, 금산법과 공정거래법 개정 수용과 (편법증여를 통한 부당이득 반납을 포함해) 8000억원의 사회헌납을 선언하니 자기들 꼴만 영 우습게 됐다는 거죠."

보수언론들이 조폭사회에서나 어울릴 법한 말을 버젓이 입에 올리는 게 황당하기만 하다.

"삼성이 참여연대나 <한겨레>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장은 잠잠하겠지만, 조금만 있으면 그들에게 다시 공격을 당할 것이니, 어디 두고보라는 말도 합디다."

변심한 애인의 뒷통수에다 대고 하는 공갈협박도 아니고, 유치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쨌든 보수언론들의 심사가 대단히 불편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삼성이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한 8000억원과 관련해 '정부 역할론'을 제기하자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들이 "정부 마음대로 (8000억원을) 쓰려고 삼성을 압박한 것 아닌가"라며 뜬금없이 흥분했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다.

"여태까지 삼성 편들어줬더니..." 황당한 보수언론

고개 숙인 삼성...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등 그룹내 수뇌부들이 7일 삼성그룹 본사에서 기자회견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인주 구조본부사장, 배정충 삼성생명사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이상배 삼성물산 건설사장, 이종왕 법무실장.
ⓒ 연합뉴스 백승렬
"보수언론들은 처음부터 삼성이 8000억을 내놓은 것에 대해 영 마땅치 않아했죠. 이 자금이 진보진영 쪽으로 흘러들어갈 경우 자신들에게 유리할 게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삼성의 미래를 걱정하고, 사회와 국민을 위한 길을 고민하기보다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는 보수언론들에게서 '사회적 공기'로서의 참언론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삼성의 2·7 발표 뒤 보수진영의 정체성 혼란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삼성의 발표가 나온 뒤 전경련, 대한상의 등 경제단체들은 일제히 '의미있고 용기있는 결단'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경제단체들은 삼성이 수용의사를 밝힌 금산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여전히 높이고 있다. 지난 2월 말 국회 재경위가 금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을 때 전경련은 국회 본회의 통과를 저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정작 금산법 개정의 당사자인 삼성이 수용의사를 밝혔는데, 계속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재계의 속내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전경련은 금산법 개정 문제가 "삼성의 입장을 떠나 재계 전체의 현안"이라고 설명했지만, 억지주장에 불과하다.

삼성을 제외하면 금산법 개정안의 영향을 받는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전경련의 임원은 방송토론회에 나와 법원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 사건에 유죄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법적 근거도 없이 국민 정서법에 따라 내린 판결"이라고 공개 비난했다.

법원이 이런 주장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둘째 치고, 에버랜드 변칙증여는 삼성 스스로 이미 "깊이 반성한다"고 밝힌 문제이다. 삼성의 2·7 발표 이후에도 여전히 과거 삼성이 고집했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보수언론이나 경제단체, 보수학자들은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자신들 스스로 높이 평가한 삼성의 결단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삼성에게는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점이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조폭적 동지애를 보이며 매달리는 보수진영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우리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고 국민들의 기대와 뜻에 부응하기 위해' 새롭게 선택한 길을 더 힘차게 뛰어가는 것이다. 앞의 길은 당장은 편해 보이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희망이 없다. 후자의 길은 당장은 힘들어 보이지만, 미래의 희망이 있다.

선택할 길은 하나뿐... 보수언론에 배신 때려라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2월 4일 저녁 출국 5개월 만에 일본 홋카이도 지토세 공항에서 회사 전용기인 '보잉 즈니스제트(BBJ)'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휠체어를 탄 채 귀국한 이건희 회장은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승용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 나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렇다면 답은 자명하다. 삼성은 2·7 발표에서 '지난날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반성'을 분명히 밝혔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한 삼성이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자기부정이고 희망이 없다.

삼성이 이 시점에서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다. 겉으론 삼성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세력들에게 참다운 '배신'을 때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낙관만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보수진영의 반발을 언론에 살살 흘리며 여론을 떠보는 삼성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걱정스런 마음이 든다. 국민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더욱 과감한 개혁조처를 뒤로 미루면서, 그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호도책은 아닐까 하고.

삼성의 2·7 발표는 그동안 국민들의 비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던 오만한 모습에서 벗어나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용서를 빌고, 스스로 바뀌겠다고 다짐했다는 점에서 큰 변화이다.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 '삼성공화국' 논란으로까지 비화된 삼성문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2·7 발표의 약발은 한 달도 안돼 이미 떨어져가고 있다.

삼성이 2·7 발표로 당장의 위기상황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안이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달 4일 귀국하면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사과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회장은 삼성의 2·7 발표 때 직접 나서지 않고 대리인인 전문경영인을 앞세웠다. '얼굴없는 사과'로는 국민들에게 더 이상 신뢰를 주기 어렵다. 삼성공화국 논란의 중심에는 온갖 불법과 편법을 주도한 구조본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책임진 사람은 없다.

이제 이건희 회장 본인이 직접 나서야 할 때다. 그래서 돈 몇푼으로 때우고 넘어가려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세금없는 대물림 문제, 전근대적인 경영권 세습문제, 구조본 개혁 문제, 금융-산업자본 분리원칙을 훼손하고 있는 소유구조 개선문제, 강압적인 무노조 경영의 대안 마련 등 산적한 현안에 대해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곽정수 기자는 한겨레신문 대기업전문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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