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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진대관이 움직이지 못한 것은 정작 청허자의 검에 베일 것 같은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청허자는 진대관이 움직이려는 것을 보고 발검해 그 짧은 순간 진대관의 혈도 세 군데를 짚었던 것이다. 검으로 점혈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검기를 발출할 수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고, 검강의 경지에 올랐다고 시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검신합일(劍身合一)의 경지를 넘어서야 가능한 경지였다.

좌중의 눈에 감탄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무당의 장문인이니 이미 검신합일의 경지를 넘어섰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심검의 단계에 들어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깬 인물은 구양휘였다.

“단혼연(斷魂煙)이로군….”

진대관의 손에 들려있던 대롱을 본 구양휘가 중얼거렸다. 오룡번으로 인해 군웅들이 모인 장안루에서 금적수사 부부를 빼내갈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아 본 것이다. 진대관은 어처구니없게 단혼연을 터트려 좌중의 이목을 흐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구효기가 고개를 끄떡이며 좌중을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일이 무사히 끝난 것 같소. 아주 다행스런 일이오. 이제부터는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마음을 모아 이곳을 무사히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오.”

당연한 일이었다. 퇴로가 막힌 그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여러분들께 한 가지 여러분들께 부탁드릴 일이 있소.”

“……?”

“오늘 밤 자시를 기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전서구를 일제히 날려 주시오. 아직 수리들이 남아 있기는 하나 우리가 가진 전서구를 일제히 날린다면 절반 정도는 살아 돌아갈 것이오. 노부가 죽폭을 쏘아 신호를 보낼 터이니 그 순간 일제히 날려 주시기 바라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바로 외부와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다.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 상황에서는 군웅들을 진정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좌중은 모두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 방법이라면 일단 외부와 연락은 될 것이다. 특히 천마곡 입구에 있는 후발대와 연락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제 회의는 끝난 것이오?”

냉랭한 목소리가 좌중의 고막을 때렸다. 모용화궁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마 흉수로 몰려 곤욕을 치른 그로서는 이 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더구나 구효기가 이미 모든 것을 사전에 계획하고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안 이상에는 더욱 그랬다.

물론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받은 모욕과 상처는 그로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정광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정말 죄송하게 되었소. 모용가주. 소제로서는 정말 모용가주께서….”

“그만 하시게. 모든 것이 본 가주의 부덕의 소치인 것을….”

말과 함께 그는 나정광이 아니라 구효기와 몽화를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천막을 나갔다.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몽화는 생각에 잠겼다.

(예상과 달리 모용가주는 아니다. 하지만 단지 진대관 뿐이었을까…?)

구효기가 모용화궁을 그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것은 몽화의 부탁에 의한 것이었다. 몽화는 처음부터 모용화궁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흉수는 바로 진대관이었다. 완벽하게 흉수를 색출해 낸 몽화는 구효기에게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바로 모용화궁이 모욕에 못 이겨 폭발할 직전까지 추궁해 보라는 것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모용화궁은 분명 자신의 형일지도 모르겠다고 밝힌 모용화천과 연관이 없었다. 하지만 의도했던 조그만 성과는 있었다. 모용화궁은 부인했지만 그는 분명 모용화천이 누군지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여하튼 몽화가 천마곡에 들어와 확인할 일 중 하나는 바로 모용화궁이 모용화천과 연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고, 그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구양휘와 함께 조만간 모용화천을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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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龍)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표흘하다-용권연신(龍拳練神).
호랑이의 움직임은 위맹하고 견고하다-호권연골(虎拳練骨).
표범의 움직임은 음습하고 강인하다-표권연력(豹拳練力)
뱀의 움직임은 유연하되 교묘하다-사권연기(蛇拳練氣)
학의 움직임은 고요하되 치명적이다-학권연정(鶴拳練精)

환영만은 아니었다. 광와노인은 하늘을 나는 신룡(神龍)이 되었다가, 두 팔을 벌리면 먹이를 제압하는 위맹한 호랑이로 변했다. 어디 그 뿐이랴! 하체를 파고드는 교묘한 움직임은 거대한 구렁이가 몸을 감아오는 듯 했다.

게다가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터져나가는 권풍은 주먹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진정 권이 무엇인지 광와노인은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권 뿐 아니라 소매로 담천의의 검을 쳐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쇠와 쇠가 마주치듯 불똥이 일면서 손아귀에 느껴지는 충격은 쇠뭉치로 검을 내리치는 듯한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소림의 비전 반선수(盤禪袖) 역시 극성에 이르렀다는 의미.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과 다름이 없었다.

콰콰콰----콰 !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 했다. 백여 초가 지나자 주위에 서 있었던 인물들은 모두 벽에 기대어 있다시피 물러나 있었다. 도저히 사방으로 비산되는 압력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광와노인은 강했다. 강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지금까지 마주쳐 보았던 그 어떠한 상대보다 강했다. 어쩌면 광노제나 광무선사가 생사를 걸고 맞섰다면 이랬을지는 모르지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도 강했다. 지금 완전한 몸이 아니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깨달음이 없었다면 백초 이상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허나 그 깨달음마저도 상승의 고수에게는 완전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광와노인의 권로(拳路)가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에 대해 피하거나 수비 역시 마음과 함께 몸이 움직였다.

그렇다고 모두 피한 것은 아니었다. 단 한 치의 차이는 엄청났다. 권격과 권형이 모두가 아니었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에서 단 한 치를 더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두 사람의 승부는 의외로 일찍 결말이 지어졌다. 광와노인이 서둘러서도 아니었고, 담천의가 복수에 눈이 멀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주 뜻밖에도 수세를 벗어나기 위해 펼친 담천의의 만검에 정면으로 마주쳐 왔기 때문이었다.

츠으으으-----

만검은 광와노인의 왼팔에 막히는 듯 했고, 휘몰아쳐오는 오른쪽 주먹에 왼쪽 얼굴을 강타당하는 듯 했다. 허나 만검은 광와노인의 팔목을 미끄러져 가슴을 파고들었고, 심장 부위를 파고드는 만검의 충격에 뻗어가던 광와노인의 우권은 담천의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
"……!"

신음이나 비명은 없었다. 정지된 두 사람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을 뿐. 담천의의 만검에 죽고 싶었던 것일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광와노인은 담천의와 동귀어진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광와노인은 바로 앞에 서 있는 담천의를 향해 웃었다. 그러더니 스스로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가슴에 박혀있던 만검을 스스로 뽑은 셈이었다.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담천의는 검을 수평으로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에 고통이 밀려들었다. 정통으로 가격당한 것도 아니었다. 헌데도 왼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움직이려 하니 시큰거림이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시큰거린다는 것은 뼈에 금이 갔거나 부러졌다는 말이다.

“완벽해… 만검이로군. 아무리 먼 거리라도 가장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그 검…! 중중무진(重重無盡)… 네 나이에 그러한 경지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야….”

광와노인의 신형은 전후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가슴에서는 아직까지 꾸역꾸역 피가 밀려 나오고 있었지만 지혈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혈한다고 될 노릇도 아니었다. 그러다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마 빛살처럼 다가 든 후송이 아니었다면 그는 뒤로 완전히 누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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