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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바라보면 희망은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수준을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좋아졌다는 말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아주 민도가 낮거나 민주화나, 사회 정의 수준이 형편없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인권이란 개념에 기댈 수도 있고 복지라는 제도에 항의할 수도 있으니 그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지 않습니까? 선진 사회가 몇 백 년 동안 이룬 업적을 우리는 단 몇 십 년 만에 이루어냈으니 아직 미비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미래의 과제로 선선히 넘길 수 있을 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변해야 한다거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점들에 있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설령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기에 변화에 대한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문제인 줄도 모른 채 당연한 듯 반복하고 있는 관습들은 우리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게 하기에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합니다.

이것은 홍세화씨가 말하는 '자발적 복종'과는 달리 당연히 따라야 할 가치, 도덕쯤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히려 이 가치, 도덕에 반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소외시킵니다. 마약 중독에 빠진 사람이 중독에 빠진 줄도 모르고 멀쩡한 사람들을 향해 미쳤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며칠 전에 동네 자그마한 교회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기겁을 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축하, ○○○ 학생 서울대 합격" 분명 교회에서 이런 축하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고 약한 자를 도우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교회에서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서울대에 합격하지 못한 다수의 약한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 교회는 깜박 잊은 듯합니다. 차라리 잊었다면 제가 그렇게 기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수의 강한 이웃만을 위해 기도하고 축하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버젓이 십자가를 걸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최후 보루인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소수의 승리자를 축하하고 있으며 다들 그것을 당연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이런 현상에 대해 무감각합니다. 병든 현실을 환자로 보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는 병명은커녕 치유책도 찾지 못하고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갈 때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학생들은 교복으로 대개 치마를 입습니다. 학생들은 그래서 여행을 가는데 특별히 여행 복장으로 교복 치마를 입고 갑니다.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보통 때에는 교복을 입다가도 여행을 갈 때에는 간편한 복장을 하는 것이 상식인데 지금 학교에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사나 학부모 모두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학생들도 무슨 옷을 입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덜어주어서 고맙다고 하기조차 합니다. 이제 봄이 되면 경주, 제주 등에 아슬아슬 치마를 펄럭이며 나돌아 다닐 학생들이 불쌍하기만 합니다.

학생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여 생기는 이런 웃기지도 않는 일들이 학교에서는 흔하디흔하게 벌어집니다. 학생들은 교장실이 있는 복도 쪽으로는 아예 통행을 하지 못하며 중앙 현관으로는 출입을 하지 못합니다.

머리카락 길이 문제나 묶는 문제는 문제의식이 높아져 해결이 되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만 대다수 학교에서는 아직도 학교에서 머리카락 길이가 길거나 머리카락을 풀고 다니는 학생을 문제아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연예인 지상렬씨처럼 머리카락 모양을 하고 학교에 다니면 이들은 분명 오래지 않아 학교의 일진으로 낙인이 찍힐 겁니다.

중앙일보 홍석현 전 회장이 검찰에 출두할 때에 중앙일보 기자들이 회장님 힘내라고 외치고 경호를 서는 일이나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촛불집회를 열며 황우석은 미국의 음모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이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기에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황우석 교수와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문회에서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고 동문들에게 촛불집회를 독려하는 일을 볼 때에 아직도 우리 사회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는 직장에서 고등학교나 대학 동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이해관계를 함께 해야 합니까? 지역감정이나 학연 등을 비판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동문 감정에 빠져 편안함을 맛보거나 이익을 취해 본 적은 없습니까?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늘 사적인 영역을 찾아 생의 활로를 뚫고 있지 않습니까? 아파트에 에어컨을 설치할 때에는 베란다에 실외기를 설치하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지금 수많은 아파트 베란다 밖에 실외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은 어쩌면 아주 일상적인 영역에 속하며 미시 담론에 해당하는 사소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부분의 문제를 문제로 여기는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거대담론이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진보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보수층이라는 계층도 이런 문제부터 자기 문제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층이 진보집단에게 거대담론이나 추상적인 진리에만 머물고 있다며 비난하는데 그렇다면 보수층은 이러한 섬세한 일상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그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보수는 발전의 방향에 대한 논의도 못하게 하면서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관습화된 모순에도 눈감아버리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겠지요.

입시철만 되면 자신의 자녀 합격을 위해 기도 주문을 하고, 주정차 금지 구역이란 주정차 허용 구역을 의미하며, 교실 한 칸을 차지한 화려한 교장실에 들어가려면 행정실을 거쳐야 하는 현실에서 진보, 보수 떠나 모두 행복과는 먼 생활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고 고민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비록 그 문제가 아주 사소한 것이어서 극히 소수만이 고민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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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사람을 위해 필요한 교육을 하고자 몸부림치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곳으로 바뀌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학교에서 경험한 일을 토대로 우리가 짚고 넘어거야 할 문제를 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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