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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의 생일 전날 저녁이었습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돌이 다가오는 아들과 백일이 갓 지난 딸 그리고 아내가 있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다른 어떤 것보다 즐거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온 집안을 어질러 놓고 놀고 있던 아들이 아빠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아내는 약간은 지친 얼굴이었습니다.

“힘들었지.”
“…….”

아들을 안아 올리고 이런 저런 장난을 하는 사이 아내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서는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갔다와?”
“쓰레기 버리러.”
“놔두지, 내가 버리게.”
“잘 버리지도 않잖아.”

퉁명스럽게 말하는 아내를 보며 이상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사실 분리수거와 쓰레기봉투 버리기는 내가 도맡아서 해온 일이거든요.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첫 아이를 출산한 뒤로 몸조리 할 때부터 도맡아서 하는 일이거든요.

“참 내일 생일인데 뭐 해줄까? 미역이랑 고기 좀 사와야겠네. 고기는 얼마나 사야 하나”
“알아서 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내게 무엇인가 불만이 있을 때의 분위기입니다. 미역과 국거리 고기를 사오는 내내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땐 그냥 아들과 노는 것이 제일 좋은 해결책입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아내가 말했습니다.

“자기 노트 다 버렸어.”
“무슨 노트.”
“뭐긴 뭐야 연애편지 적는 노트지.”
“헉.”

아직도 남아 있었나 봅니다. 아들 녀석이 책꽂이의 책들을 뒤집어 놓았고 그것을 치우던 아내가 결혼 전 내가 쓰던 노트를 발견하고 읽어보았나 봅니다. 예전에 편지를 많이 쓰곤 했는데 대부분 노트에 대충 적어보고 정서해서 보내곤 했습니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 누군가에게 썼던 것일 겁니다. 매우 유치한 편지였을 겁니다.

몇 달 전에도 아들이 내가 대학 때 보던 책갈피에서 군대에서 받았던 편지를 꺼내들고 엄마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습니다. 결혼할 때 모든 것을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그날도 대대적으로 정리를 하고 이젠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또 생기다니 아들이 원망스럽습니다. 퇴근한 후에 내가 있을 때 그럴 것이지, 하필이면 엄마랑 있을 때만 그런 것을 찾아낸단 말인가요.

생각해보니 아내에겐 편지다운 편지 적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내의 생일에는 정성은 들어 있으나 맛은 없는 미역국을 끓였습니다. 또 저녁 때는 아내가 좋아하는 프리지아 꽃 한 다발과 하루 종일 생각해서 적은 편지 한 통으로 겨우 겨우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내겐 당신뿐이야. 지난 일들은 당신을 만나기 위한 과정에 스쳐 지난 풍경이었을 뿐이야. 칠칠맞지 못한 남편을 너그럽게 봐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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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사람에겐 편안함을, 친구에게는 믿음을, 젊은이에겐 그리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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