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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명문혈에서 장심을 떼고 부드럽게 등을 쳐주자 백결의 입에서 시커멓게 변색된 피 한 모금이 토해지며 슬며시 눈을 떠졌다. 이미 조금 전 의식은 차린 상태였다. 하지만 담천의의 진기를 받아들여 운공을 하고 있었던 터라 눈을 뜨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빌어먹을… 눈을 뜨자마자 보기 싫은 얼굴부터 보게 되는군."

백결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겨우 의식을 차리고 나니 상엽과 그 형제들의 얼굴이 보인 것이다. 이런 순간에 저들이 나타나다니 지독히도 재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곳은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곳도 아니었다. 기껏 급한 김에 찾은 곳이 넓은 지하광장의 구석이었고, 간신히 두세 사람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움푹 파여져 있었기 때문에 약간 돌려져 있다 하더라도 가슴위로는 보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네놈에게 감사하고 싶군."

상엽의 이빨 사이로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전신에서 뭉클 지독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아직까지 용케 살아주어서 말이야…."

"감사할 것 까지 있나? 나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네. 앞으로 삼십년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을 걸세."

백결의 빈정대는 말투가 신경에 거슬릴 만도 했지만 상엽은 이미 독 안에 든 쥐라 생각했던지 오히려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흐흐… 실컷 지껄여보는 것도 좋겠지. 그 입을 나불거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까…."

그 순간 가부좌를 틀고 백결의 등 뒤에 앉아 있었던 담천의가 가부좌를 풀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것은 마치 바닥에 회전판이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느긋한 미소가 물려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당황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는구려. 하여간 당신을 만나게 되다니 나 역시 감사해야겠소."

일순 상엽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자는 분명 담천의란 작자였다. 전월헌과 승부를 겨뤘던 자임도 생각해 냈다. 백결을 쫓느라 먼저 장내를 떠났기 때문에 전월헌과의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저 자가 이곳에 버젓이 있는 이상 전월헌이 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완전하게 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전월헌은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고수였다. 전월헌을 아는 사람들의 평가에는 인색함이 없었다. 그런 전월헌을 꺾은 자라면 극히 조심해야 했다.

"무엇을 감사한다는 말인가?"

상대를 알아야 했다. 저 자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들었다. 하지만 직접 대하고 보니 그들의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저 평온함과 은근한 위엄은 절대고수가 반드시 갖추어야할 덕목이었다. 저 자는 그것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을 좀 가르쳐 주시오. 왜 이리 복잡하고 위험한지 모르겠소."

만약 이런 분위기에, 이런 사이가 아니라면 매우 친한 사이인 줄 착각했을 것이다. 허나 이런 상황에서는 폭소라도 터트릴 수 있는 말이었다. 아주 천연덕스럽게 자신들을 죽이려 쫓아온 자들에게 이곳을 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달라니…. 저 자는 지금 미쳤거나 아니면 자신들을 놀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엽은 감정의 폭발을 극히 자제하고 있었다. 저 자는 가부좌를 튼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마주하고 있는 자신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기를 발산하는 것도 아님에도 상대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추측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상엽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들의 안방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곳에 들어온 이상 그들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결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는 위축되는 마음을 추스르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자네는 이곳을 모르는군. 이곳에 들어 온 외인(外人)은 살아서 빠져나간 적이 없는 곳이네."

"허…. 그럴 리가 있겠소?"

"자네는 자네가 있는 이곳이 어디라 생각하는가?"

상엽의 어조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담천의에게 받았던 위축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천마곡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통로… 연동이라고 들었소."

담천의가 순순히 대답하자 상엽은 고개를 끄떡였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네. 자네가 들어온 곳은 연동이지만 이곳은 연동이 아니네."

"연동에 들어왔고, 아직 연동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연동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의미요?"

내용은 호기심이 담긴 것이었지만 담천의의 어조는 그리 궁금하다는 기색이 아니었다. 사실 이곳이 연동이던 아니던 무슨 상관이 있으랴! 담천의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 대화를 끌면서 바닥난 체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만약 담천의에게 시간이 있어 자신의 진기와 융합시킨 광폭한 기운을 완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급격하게 내력이 딸리거나 지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백결로 인하여 그러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그는 광폭한 기운을 자신의 선천지기에 동화시켰지만 아직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더구나 백결을 추궁과혈해주고, 일시적으로 회복한 삼성(三成) 가량의 진기마저 그의 운공을 돕는데 소모하다보니 체력이 일시적으로 바닥나 있는 상태였다.

일단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말을 하면서 운공을 하는 것은 보통 무림인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현심경의 깊은 깨달음은 완전치는 않아도 어느 정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다가온 깨달음은 점차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고, 인간의 한계를 하나씩 극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가르쳐주고는 싶네만…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군. 저승 가서 염왕(閻王)께 물어보게."

상엽은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면서 담천의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체력이 바닥나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다 담천의의 입에서 미세하지만 하얀 김이 서려나오고 그것이 곧 콧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상엽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잔꾀를 쓰는군."

말과 함께 그는 벼락같이 담천의에게 달려들며 연속적으로 발길질을 해댔다. 담천의와 백결이 있는 곳은 그리 움푹 파인 것은 아니었지만 공간이 좁아 검을 휘두르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슈슈슉---

공기를 가르며 파고드는 상엽의 발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고 위력이 있었다. 허나 담천의는 여전히 가부좌를 풀지 않은 채 피하는데, 그 모습은 너무 자연스러워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머리와 가슴, 그리고 양 어깨를 노리고 파고드는 상엽의 발을 그리 크게 움직이지 않고 슬쩍슬쩍 피해내고 있는 것이다.

"역시 쉽게 상대할 놈은 아니군."

상엽의 목소리에 냉랭함과 함께 감탄의 기색이 서려있었다. 짧은 순간 십여 번의 발차기를 했음에도 손끝 하나 건들지 못했던 것이다. 상엽은 내심 당황했다. 정말 쉽게 상대할 놈이 아니었다. 허나 정작 담천의 역시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내력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샘에 물이 고이듯 회복되겠지만 자꾸 내력을 사용하게 되면 고일 사이도 없이 바닥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지금 자신은 진기가 바닥을 드러낸 상태다. 최대한 움직임을 줄이고 시간을 끌어야 하는 것이다.

헌데 기이하게도 상대의 공격이 확연하게 보이고, 그 공격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시위를 떠날 때는 천근거암이라도 뚫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진 화살이 그 힘을 다하는 순간에는 종이 한 장 뚫지 못하는 이치처럼 상대의 공격범위 끝에 있음으로서 상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그저 몸이 반응하는 대로 최소한의 거리를 움직이자 극히 미세한 차이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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