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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은 찰기가 남다르다. 녹으면 그냥 물이 아니라 알갱이에도 서리가 낀듯 찹쌀이 잘 퍼져있는 듯 하다.
대봉은 찰기가 남다르다. 녹으면 그냥 물이 아니라 알갱이에도 서리가 낀듯 찹쌀이 잘 퍼져있는 듯 하다. ⓒ sigoli 고향
살 떨리는 기분 만끽할 수 있는 추위와 간식

나는 아이스크림을 싫어한다. 내가 먹는 걸 즐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먹는 것마저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일단 부드럽든 딱딱하든 먹고 나면 뒤끝이 개운치가 않다. 남들보다 먹는 속도도 영 느리다. 먹고 나서 맹물 한잔 반드시 들이키지 않으면 찜찜하기도 하다.

게다가 아이들이 여름에도 달라고 우기면 갖가지 수를 찾아서 먹지 못하도록 말리는 아버지다. 어떤 날은 애들에게 아예 물려서 싫어지도록 두 개씩을 입에 물려준 적도 있었다.

여름이면 매일같이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키우면서 한 가지 짜낸 묘수가 다름 아닌 “해님이 없잖아”이다. 이건 철칙이어서 흐린 날, 비 오는 날, 해 질 녘에는 아무리 날이 후텁지근해도 절대 먹을 수 없다는 걸 아이들도 안다.

세상을 살면서 이해하지 못한 게 한두 가지랴마는 물을 사고팔던 1990년대 초중반 현대판 ‘북청물장수’는 퍽 얄미웠다. 도무지 물을 파는 작자들 심보를 알 수 없었다. 얄밉기까지 했다. 이보다 더 아리송하게 알 수 없는 일이 겨울철에 아이스크림이나 하드를 먹는 족속이다.

세상은 날로 변하여 예전 추억을 담아 파는 사람도 있고 전혀 상품이 될 성싶지 않은 것을 내놓아 생활 깊숙이 파고들게 하기도 한다. 시골엔 그냥 널려 있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이 도시생활을 하다 보면 돈 주고 사야 하는 품목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아! 봄인 줄 알았는데,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휘갈겨야 하는데 골이 지끈거릴 지경으로 춥구나. 오매, 바람마저 불어대니 “치치치” 이(齒)끼리 달달달 떨리며 부딪힌다.

요때 어김없이 생각나는 게 있지. 홍시와 얼음이다. 여기에 꽁꽁 언 동치미도 곁들이면 냉랭한 기분 만끽하기에 충분하겠다. 눈이라도 펄펄 내리면 더 맛있겠다.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우린 추억을 먹는 동물이라 빗겨갈 수 없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니다. 내복바람으로 찬 기운을 뼛속까지 느낀 바에야 치열하게 차가운 맛, 살 떨리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음이다.

우지뱅이란 짚을 묶어 벙거지처럼 위에 덮어씌워 무를 추위로부터 막았다. 예전 어른들은 이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우지뱅이란 짚을 묶어 벙거지처럼 위에 덮어씌워 무를 추위로부터 막았다. 예전 어른들은 이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 sigoli 고향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엇가리 속에 가둬둔 감홍시 먹던 추억

먼저 홍시를 먹어보자. 가장 큼직한 대봉으로 할까? 홍시는 그냥 아무 데나 보관한 그저 그런 감이어서는 안 된다. 온기가 하나도 없는 광방에 넣어두어도 좋지만 이보다 더 기막힌 저장방식이 있다.

일단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가볼까. 아버지는 포식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병아리와 암탉을 같이 가두던 엇가리를 꺼내셨다. 감을 반대기나 광주리, 함지박에 차곡차곡 놓는다. 사다리를 지붕에 걸쳐서 조심조심 위로 오르신다.

물매를 가르는 용마루에 가깝게 바짝 붙여서 놓고 대나무로 만든 엇가리를 덮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짚 한 다발을 모가지 부분을 묶고 이삭이 달렸던 비나 눈을 막기 위해 꽁지 부분을 파마하듯 훔쳐서 묶는다.

쫙 펼치니까 움집 형태가 짚 한 다발로 완성되었다. 이 ‘우지뱅이’는 대개 월동 무를 땅속에 묻고 나서 씌우면 얼지도 않고 바람도 들지 않지만 감을 저장할 때도 흔히 썼다. 고루 펴서 단속을 하고 이제 두껍게 꼰 새끼줄을 사방으로 묶어 찬바람에도 끄떡없도록 고정한다.

처음엔 무른 홍시가 아니라 붉게 익었을 뿐 단단했던 감을 두고 11월, 12월을 지나 1, 2월이 되면 된바람, 동장군을 감싸 보호해주던 우지뱅이에 포근히 안겨있던 감이 초반에는 홍시가 되려고 물러진다. 지푸라기의 도움으로 발효가 촉진되다가 소한, 대한, 입춘 무렵에는 한번 꽁꽁 언다.

출출한 밤이다. 양지쪽은 더 쨍한 햇볕을 받아 오후 서너 시 깨는 풀어졌다가 해 질 녘 차르르 살얼음이 얼었다. 물기 탱탱 슨 생물고구마 깎아 먹는 것도 한두 번이다. 윗목에 간이 뒤주에 넣어둔 당감자(고구마)는 곰팡이와 부스럼딱지가 끼어 삶거나 구워도 쓰디쓸 뿐이다.

국 그릇에 가득찬 대봉시 하나면 무척 배가 부르다. 여름철에도 아이스크림 대용으로 상품화되어 고속도로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 참 구미를 당기게 생겼다.
국 그릇에 가득찬 대봉시 하나면 무척 배가 부르다. 여름철에도 아이스크림 대용으로 상품화되어 고속도로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 참 구미를 당기게 생겼다. ⓒ sigoli 고향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다 보면 냉수 한 그릇 먹고 속을 차릴 수는 있으나 허기는 물리치지 못하니 식구끼리 눈치 꼬치로 신호를 보냈다. 주린 사람 궁한 아이들이 내복바람에 외투를 걸치고 소쿠리 하나 들고 늘 집에 기대 서 있던 사다리로 나간다. 난 밑에서 받히고 형은 지붕 위로 올라갔다.

“성, 조심혀.”
“걱정 붙들어 매.”
“괜잖은가? 안 미끄러지겄어?”
“새다리나 잘 잡고 있어야.”
“내껀 한나 더.”
“그려.”

위에 오른 형은 우지뱅이를 걷고 엇가리를 들어 옆에 조심히 옮긴다. 소쿠리에 한 개 한 개 담고 있다. 이제 다리가 후들거릴 때가 되었다. 추위 때문이기도 하고 옹색한 곳에 꼿꼿이 서 있기가 쉽지만은 않다. 덜덜덜 떨면서 식구 수대로 꺼내고 한 개 더 추가했다.

처마 끝에 소쿠리를 두고 원상태로 덮느라 잠시 시간이 흘렀다. 무게가 제법 나가는지라 구부정하게 반은 엎드려 바구니를 쭉쭉 밀어 끝에 다다랐다. 위를 한없이 쳐다보던 나는 침이 꼴딱꼴딱 넘어간다.

“지달려. 내가 위로 올라갈텡께.”

사다리 위쪽으로 올라 간신히 받아 안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래로 내려오느라 진땀을 뺐다. 으쓱한 겨울밤에 식은땀이 났다. 가까스로 신줏단지 모시듯 껴안고 내려와 바닥에 툭 놓고는 형이 마저 내려오길 기다렸다.

“아이고 추워. 겁나게 춥다.”
“인자 얼매나 남았덩가?”
“잉, 아직도 많당께. 서너 번은 더 묵어도 될 것이여.”

도둑질도 아닌데 우린 늘 초승달 옅은 빛에만 의지해 올라갔다. 짝 달라붙는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닫으니 덜컹 소리와 함께 바람도 방안으로 쏘옥 기어들어왔다. 휘청하고 호롱불이 꺼지려다 똑바로 선다. 형제 둘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찬찬히 닫제 그냐.”
“허벌나게 춥당께라우.”

몸을 녹이는 사이 감도 우리와 어울릴 준비를 한다. 솜이불을 덮어쓰고 깨어있는 모든 사람들이 호롱불 앞으로 몰려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작은형, 누나, 셋째형과 나는 하나씩 배급되기를 기다렸다. 난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다던가. 깊은 꿈나라로 떠난 동생 연순이는 깨우지 않았다.

해강이와 솔강이가 서로 먹으려고 숟가락을 갖다 댄다. 변이 잘 나오지 않으면 감꼭지와 연결된 스펀지같이 하얀 부분을 빼고 먹어야 한다.
해강이와 솔강이가 서로 먹으려고 숟가락을 갖다 댄다. 변이 잘 나오지 않으면 감꼭지와 연결된 스펀지같이 하얀 부분을 빼고 먹어야 한다. ⓒ sigoli 고향
받아든 감이 서릿발을 하얗게 뱉어낸다. 물기가 잡히든가 싶더니 끈적이는 느낌이 약간 있다. 차가워서 그냥 들고 있기가 쉽지 않다. 잠시 내려놓았다가 옷매무새를 고치고 홍시에 몰입하였다. 다들 껍질을 뜯어내 튀바지에 담느라 바쁘다.

온돌방과 따스한 손 열기를 받아 사르르 껍질과 보드랍고 달짝지근한 속이 분리되었으니 벗기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껍질에 달라붙은 홍시죽을 핥아먹고 꼭지에 붙은 흰 부분도 쏙 빨자 이내 입안에 달콤한 향기가 감돌았다. 침이 한없이 고였다.

들고 있던 얼음보숭이 홍시를 베어 먹었다. 아사삭, 서걱서걱 얼음이 씹히더니 달보드레하고 끈적끈적한 참즙(엑기스)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뜨거운 국물을 떠먹을 때와 딴판이다. 혀에 닿는 순간 골이 먼저 화들짝 놀란다.

평소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까먹고 살던 우리는 이에 바람 든 것 마냥 사정없이 시리면 그제야 긴긴밤 주전부리가 신통방통 고마운 줄 알았다.

여기서 “쪽!”
저기서 “훕!”
동시에 “후루룹!” 귀마저 즐겁다.

더 녹자 후딱 정지로 나가서 숟가락 통을 들고 와 하나씩 나눠줬더니 퍼서 먹는다. 설컹설컹 씹히던 홍시가 이젠 죽이 되었다. 설컹거리고 물컹한 조화를 무엇에서 찾을까. 나머지는 정월 대보름이 다가와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니 반은 죽이 되어 풀어지매 우리와 어른들이 즐기기에 좋았다.

배마저 충분히 부르다. 잠마저 확 달아났으니 이 긴긴 밤을 어찌 보낼까 보냐. 이불에 묻을세라 혀를 날름거려 입술을 훔치고 아랫목으로 기어들어갔다. 절절 끓는 방 적당히 배가 부르니 잠으로 빨려들어 갔다.

색깔이 약간 흐리지만 여러가지 내용물을 넣어선지 부드러웠다. 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진 모습이 정겹다.
색깔이 약간 흐리지만 여러가지 내용물을 넣어선지 부드러웠다. 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진 모습이 정겹다. ⓒ sigoli 고향
아련한 그 맛 못 잊어 아이스크림 손수 만들어주기로

그러나저러나 한번 들인 맛은 쉬 잊지 못하는 법. 특히 단 것에 대한 이끌림은 무지막지하다. 입에 대면 자꾸 달라고 하는 게 단 것이다. 달기보다 쓰디쓰다 할 정도로 강렬했던 사카린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뒤늦은 막바지 추위에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추억을 아이들에게 팔아 점수를 따기로 했다. 다섯 살짜리 솔강이를 꼬드겼다.

“솔강아 우리 아이스크림 만들어 먹을까?”
“아빠 진짜요?”
“응, 아빠가 맛있게 만들어 줄게.”
“야~ 신난다.”
“그러니까 솔강이는 오늘 누나랑 어린이집에서 즐겁게 놀다가 와. 알았지?”
“알았어요.”

하드장사가 마을에 오면 자전거 뒤를 졸졸 따르다가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오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껍질에 쌀을 넣고 달걀밥을 즐겼던 우린 겨울엔 맹물에 사카린을 녹이고 그릇에 담아 장꽝에 올려놓았다.

그 외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무채색이다. 약간 얼음이 얼면 깨끼 대를 꽂아놓고 다음날 아침 장독대에 가보면 꽁꽁 얼어있었다. 단맛 외엔 아무 맛도 없던 걸 맛나다가 오전 내내 빨아먹었던 그 때가 며칠 전 일인 듯 선연하다.

이번 설에 성묘가는 길 도랑에 나뭇가지와 풀에 고드름이 매달려있었다. 해강이를 따주었더니 맛나게 먹었다. 어린 시절 깨나 먹었는데 어른들은 얼음 많이 먹으면 목구멍에서 피가 나온다고 했는데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이번 설에 성묘가는 길 도랑에 나뭇가지와 풀에 고드름이 매달려있었다. 해강이를 따주었더니 맛나게 먹었다. 어린 시절 깨나 먹었는데 어른들은 얼음 많이 먹으면 목구멍에서 피가 나온다고 했는데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 sigoli 고향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도착했다. 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는 아침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빠, 아이뜨끄림….”
“응, 그게 아빠가 바빠서 만들지 못했거든 지금 같이 만들자. 미안해.”
“괜찮아.”

아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 그냥 흰설탕만 넣어도 될 일이지만 색다르게 하고 싶었다. 사과 한 개 껍질을 벗기고 우유 중간 걸로 한 개, 포도즙 한 팩, 조청을 약간 넣고 믹서에 갈았다. 잘 갈려서 걸쭉해진 상태다.

그릇 두 개에 나눠 담아 두고 잠을 잤다. 냉장고보다 자연이 그대로 이용해도 되겠다 싶게 날씨가 무척 춥다. 아이들이 잠을 자는 사이 막대기를 하나씩 꽂아주고 아침이 밝아오길 기다렸다.

잘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를 깨우는 수단으로 한번 써 먹어볼 요량이었다.

“솔강아, 아이스크림 먹게 얼른 일어나. 해강이도. 아빠가 갖다놓았어.”

어린이 프로그램을 한참이나 틀어놓아도 잘 일어나지 않던 아이가 두말하지 않고 깨어나 눈을 비비고 상 앞에 앉았다. 조그만 깍쟁이가 아니라 밥그릇과 국그릇에 푸짐하게 했으니 한 개는 남겨서 다음에 먹기로 했다.

칼로 자르니 내용물이 많아 부드러워서인지 쉽게 나눌 수 있었다. 해강이는 두 조각 먹고 나자빠졌지만 솔강이는 이가 시리다면서도 쉼 없이 먹어댄다. 직접 먹어보니 욕심이 좀 과했지만 추억 하나는 넘겨준 셈이다. 다음부턴 최대한 간소하고 깔끔하게 만들어야겠다.

지난 가을 배추로 내가 직접 담근 배추 동치미가 추위에도 아랑곳않고 적당히 맛이 잘 들었다. 아이들도 잘 먹는다.
지난 가을 배추로 내가 직접 담근 배추 동치미가 추위에도 아랑곳않고 적당히 맛이 잘 들었다. 아이들도 잘 먹는다. ⓒ sigoli 고향
이번 설에 시골에서 가져온 대봉을 꺼내 나눠 먹었다. 오늘 저녁엔 아직도 밖에서 덜덜덜 떨고 있을 싱건지-동치미를 꺼내 멸치 넣고 시원하게 국을 끓여 밤이 깊어 출출해지면 밥을 넣고 동치미죽을 끓여 먹고 싶다.

이렇게 사흘 밤을 보내고도 부자가 부럽거나 권력이 못내 아쉬우면 세상 헛산 것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이번 설 전에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창간하여 어릴 적 추억과 맛있는 이야기를 되살리고 있다. 아련한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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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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