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나, 남자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한 권혁범 교수.

숨 막히는 국가주의의 집단 주술에서 벗어나 '국민'에서 주체적인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며 이태 전 '국민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했던 권혁범 교수(대전대 정치외교학과)가 이번에는 '나, 남성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다.

▲노골적인 마초 ▲생각은 성차별적이지 않으나 성차별적 언행을 일삼는 남자 ▲여성학도 배우고 성평등이 뭔지 알면서도 여전히 남성우월주의적인 남자 ▲언행일치 남자 페미니스트 등 네 가지 남자 부류 중 네 번째라는 그는 특히 세 번째 부류, '여성학도 배우고 성평등이 뭔지 알면서도 여전히 남성 우월주의적인 남자'를 페미니스트로 만들려는 '돈오'비법을 전수하려고 한다.

그는 또 '노골적인 마초'는 포기하더라도 남성중심문화속에서 생각 없이 자랐고, 또 현재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계산도 있는 '생각은 성차별적이지 않으나 성차별적 언행을 일삼는 남자'에게도 여러가지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주면 변화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권 교수는 자신의 강의 '성과 문화의 정치학'을 듣는 수강생들 대부분이 이 부류에 속하는데, 학기말이 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전했다.

'어째서 그렇게 여자 편만 드느냐'고 야단맞는(?) 남자 권혁범 교수는 자신은 남자로서 여자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여성주의가 여남에게 근본적으로 정의롭기 때문에 또한 자기 자신을 수혜자로 인식하기 때문에 여성주의 편을 '택'한다고 말한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또하나의문화 펴냄)를 낸 권혁범 교수를 때마침 설 연휴여서 오가기가 여의치 않다는 핑계를 대고 설 직전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김경숙씨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표지 이미지.
ⓒ 또하나의문화
권혁범 교수는 자신의 책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를 YH사건의 '고 김경숙 선생에게' 바친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내가 만약 여자라면'이라고 제목을 단 서문 맨 마지막에서 "그를 기억하며 살아간다"고 각오를 다졌다. 왜일까. 그 이유가 가장 먼저 궁금했다.

"제가 군에 있을 때인데, 제 또래의 가난한 여성노동자가 비참하게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경숙씨가 다른 환경, 다른 사회에 살았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겠죠. 그때부터 여성과 빈곤이라는 이중적 소수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징적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애도와 해원의 의미로 또 여전히 그런 굴레에 갇혀 사는 자들을 상기하자는 취지에서 그렇게 썼지요. 또 전태일 열사에 비해 거의 누구도 김경숙 선생을 기억하지 않는 게 안타까웠구요."

그렇다. 김경숙이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임에도 망각을 강요당한 이유는 '여성'과 '빈곤'이라는 이중적 소수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권 교수는 특히 '여성'에 방점을 찍어 설명하려고 했다. 역시 그런 그에겐 '남자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권 교수는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게 아니라 가부장적 속박 속에서 다른 형식으로 억압을 받고 있는 남성을 해방하는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고 한다.

"물론 여성주의자들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남성이 이런 얘기를 한다면 남성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가지 않겠냐 하는 생각도 있었구요. <한겨레>에서 '여성깨기'를 시작으로 <말>지에서 '남성깨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독자를 만났는데 호응이 좋았습니다. 그게 한권 분량쯤이 되니까 주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쪽에서의 우군이 필요하다며 책으로 낼 것을 권유했습니다. 여성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책이 나오고 나니까 좀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서인가, 애초 이 책의 제목을 '나, 남자 페미니스트'로 했다가 너무 선언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좀 부드럽게 남성 독자들에게 다가가려는 의도에서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로 바꿨다는 권 교수는, 하지만 남자들이 이 책을 사 볼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했다.

'왕따'를 자처한 아웃사이더

페미니스트와 남성, 성평등, 억압, 진보, 개인 등을 이 책의 핵심 키워드로 꼽는 권 교수에게 책에 실린 글들 중 2000년에 쓴 것들도 있다며 적어도 5년 이상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느낌을 전하자 그는 "그런가요?"라고 반문한 다음 자신도 놀랍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건 성평등의 기준에서 보면 그만큼 세상이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했다.

일전에 한 페미니스트 제자로부터 "젠더문제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삼느냐"는 질문과 함께 "'페미니스트적'일 뿐 '페미니스트'는 아니다"는 지적을 받았다며, 권 교수는 자신이 자칭 타칭 남성 페미니스트이지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고민스럽다고 했다. 다만 이런 식의 질문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달가워하지 않는 마초들의 흔한 수법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남성의 연대를 방해하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태클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대학 다닐 때 나혜석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를 읽고 페미니스트로 커밍아웃했다는 권 교수는 학보에 '여성해방운동서설'이라는 글을 기고했다가 마초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운동권 진보주의자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었다며 이 땅에서 남자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은 '왕따'를 자처한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법과 제도는 바뀌고 있는데 가정이나 학교 교육에서, 문화에서 변화가 더뎌 페미니스트의 가능성이 매우 큰 제자들이 결혼 후에 다시 마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그에게 여성과 남성이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을 위해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요구되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물어봤다.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가 체화시킨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주체로서 살아가야 하고, 남성들은 항상 자신이 잠재적 실질적 수혜자/가해자라는 인식을 갖고 자신의 여성관에 대해 겸손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태도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혼할 권리도 있다!"

권혁범 교수는 누구인가

'사나이는…'과 같은 여남차별적 언행을 하지 않는, 성평등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권혁범은 초등학교 시절 반에서 유일하게 박정희를 싫어하는 소수자의 삶을 살기 시작하여 중학교 때부터 삐딱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고등학교는 죽어도 가기 싫어 지금도 부모님이 모르는 방법-아직 밝힐 수 없다고 함-으로 다니지 않고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 페미니스트로 커밍아웃한 그는 환경과 젠더, 민족 국가의 관점으로의 고민이 본격화되었고, 군대 시절 청춘을 그냥 보내는 게 아까워서 제대 전 모포를 뒤집어쓰고 몰래 쓴 문학평론이 신춘문예에 당선됐으나 지금은 개점휴업 상태이다.

결국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니카라과나 쿠바혁명에 대해 글을 쓰던 권혁범은 미국에 유학하고 대전대 정외과 교수로 있으면서 '성과 문화의 정치학' '환경정치학' '인권과 평화의 정치학' 등 주로 비주류 과목을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과 <국민으로부터 탈퇴>를 비롯 여럿이 함께 쓴 <아빠 뭐해?> <우리 안의 파시즘> 등이 있다.
권혁범 교수에게 주례를 부탁하려면 여섯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검소한 결혼식, 신부 신랑 함께 입장 또는 둘 다 단독 입장, 가사노동 50대 50 분담, 결혼 후에도 검소하게 독립적인 삶 유지, 부모와 갈등이 생겼을 때 아내 편 확고히 들기 등이 그것인데, 이 사항들은 페미니즘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수긍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 또 하나의 조건은 의외다. 직접 인용해본다.

"당연히 평생 사랑하고 백년해로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일은 모르는 법. 불행한 결혼 생활보다 이혼이 낫다. 이혼을 금기시, 범죄시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혹 두 사람의 관계에 결정적 파경이 왔을 때 흉기나 주먹을 사용해서 희망 없는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지 말고 서로 재산 및 양육 문제를 공평하게 해결하며 깨끗이 헤어질 것을 맹세해야 한다. 사랑은 자유다!"

그래서 그는 '철없는 지식인', '무책임한 교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사람', '진정한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등 온갖 원색적인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권 교수는 이혼은 권장사항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흠집'도 아니라며, 이혼할 권리는 인간의 행복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의 '인권'이라고 했다.

이런 그의 급진성(?)은 성 문제에 이르면 절정을 이룬다. 권 교수는 성인 당사자들 간에 동의가 있는 한 어떤 형태의 성적 결합도, 모험도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인이 있는 자, 비혼자 혹은 기혼자라 해서, 같은 성 간이라 해서 그 성적 권리가 박탈되어서는 안된다며 권 교수는 자신의 파트너에 만족하지 못할 때 성·사랑·새로운 결혼의 탐험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성은 '문란'할수록 좋다며 간통을 '죄'로 규정하는 법률은 국가보안법만큼 한심하고 반인간적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페미니즘 너무 온건해 문제"

항상 남성을 앞세우는 풍토를 바꾸고 싶어 여남평등, 여남차별 같이 '여'자를 '남'자 앞에 쓰려고 한다는 권 교수는 많은 남성들로부터 공격을 심하게 받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족들 사이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가족들은 좋아합니다. 집안 분위기가 성차별을 거의 하지 않는 분위기라서…. 얼마 전에 질녀가 결혼했는데 조카사위가 저보다 더 페미니스트여서 집안에서 '저보고 가짜 아니냐'는 농담을 합니다."

학교나 군대에서 체화된 폭력적 성향 같은 게 자신도 모르게 길거리에서 튀어나오려 할 때 자신에게 남아있는 가부장적 마초적 기질을 발견한다는 그는 여전히 가사노동이 서툴고 힘들다고 고백한다. 그의 가사노동의 숙련도는 홀로 서기를 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자연스럽지 않다는 게 그의 평가.

그의 시선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 연예인의 사건들을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며 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세계 유명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에서 남자로서 일면 감정이입을 하다가도 남자 의식의 한계를 보면서 남자 감독들에게 자기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남자들 여럿이 어울리는데 가면 아주 불편하다는 것. 진보적인 사람들도 사석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기 때문에 일일이 논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웃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는 남성들만의 모임에는 잘 안 간다.

한국의 페미니스트가 너무 평화적이고 온건해서 오히려 문제라고 말하는 권혁범 교수는 우리의 피 속에 가부장적 의식이 녹아있기 때문에 법적 강제력과 끊임없는 교육, 특히 초등학교 때부터 인권문제로 접근해 교육하는 등 여성주의적 의식을 내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혁범 교수는 인터뷰를 끝내면서 비록 여성들에게는 아주 기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이 아직 자기 성찰을 하지 못하는 남성들에게 자아를 냉정하게 바라보는데 자극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지음, 또하나의문화(2006)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