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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는 레오니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는 레오니 ⓒ 김동현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을 마음에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때, 만리타향에서 오랜만에 맞는 연휴를 외로이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찾아봤다.

한국에 온지 12년이 됐다는 방글라데시 출신의 제임스(32)와 부인 로지나(24), 그리고 3살짜리 아들 레오니. 이들에게서 명절을 앞두고 고향을 떠나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통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었다.

가장인 제임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제조업체에서 잡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아침 8시30분까지 출근해야 하는 그는 밤 9시까지 하루 12시간이 넘는, 남들보다 긴 하루를 고된 노동으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한 달 내내 고단하게 일한 그에게 쥐어지는 돈은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와서 배운 것이라고는 현장에서 내국인들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잡일들. 때문에 제임스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버릴 수 없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는 부인과 아들이 국내에서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모든 돈을 고향에 보낼 수밖에 없단다. 따라서 그는 쉴 수도 없고, 또 일자리가 없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날 기자가 찾은 제임스의 집은 한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불도 마음대로 켤 수 없다. 어둠도 익숙해지면 지낼 만 하다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가재도구라고는 중고시장에서 사온 낡은 TV 한 대와 냉장고, 가스렌지가 전부. 국내 기준으로 보면,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기요금과 난방비조차도 아껴야 한다는 절박감이 절절이 배어 있다. 이들이 처음 일자리를 찾아 국내로 왔을 때부터 이런 상황은 아니었다. 합법적인 신분으로 부인 로지나와 함께 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약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절이 아득한 기억 속의 꿈만 같다.

우리나라에서 이들의 신분은 범법자다. 불법 체류 중인 범법자. 따라서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레오니는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다. 무적자다. 국적도 없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조차도 현실에만 있지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아들 레오니는 갈 곳도 없단다. 부인 로지나가 맞벌이를 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좀 이겨보려 했지만, 레오니를 맡아주는 곳이 없었다. 힘들게 보냈던 어린이 집에서도 며칠을 견디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 부모가 외국인과 함께 교육시킬 수 없다고 했기에 어린이 집에서도 받아주질 않았단다.

또 레오니는 아파서도 안 된단다. 불법 체류자의 신분에 아프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가장 제임스의 벌이로는 병원에 가기도 힘들다. 레오니가 아프면 고향에서 어른들에게 배웠던 민간요법을 적용해 보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그러나 이들을 더욱 힘들게하는 것은 '단속'이다. 가끔씩 벌어지는 출입국 관리소의 불법 체류자 단속 때문에도 이들은 집과 회사를 벗어날 수 없다.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며칠째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십중팔구 단속반에 잡힌 탓이다. 그러니 외출도 맘대로 할 수 없다.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보내야하는 로지나와 레오니에게는 이 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방안에 틀어 박혀 TV 보는 것인데, 이도 전기요금을 생각하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아내 로지나의 삶은 “너무 갑갑해요. 나가고 싶어요”라는 두 마디로 압축된다. 차갑고 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진 지하 단칸방은 이들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녀도 우리나라 20대들과 다를 것이 없다. 행복한 꿈을 꾸며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던 초기의 삶은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행복에 대한 희망은 어느새 절망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니 절망으로 이미 변했다.

행복할 것이라 믿었던 한국에서의 삶은 고단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지하 단칸방의 어두움에 익숙할만도 한데 아직도 밖으로 나가자는 만 3살의 레오니. 떼를 쓰는 레오니를 말리는 로지나의 마음은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내색은 할 수조차 없다.

'코리안 드림'의 부푼 꿈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들 앞에는 불행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더운 지역에서 온 이들에게 우리나라의 겨울은 10여년이 지나도 적응이 쉽지 않다. 살을 에는 추위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단속반의 단속.


그래도 이 땅을 쉽게 떠날 수 없다. 벌써 10여년을 지낸 이 땅에 나름대로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몸이 아플 때 고향이 제일 생각난다는 제임스는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만리타향에서 지내는 외로움, 특히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가족 친지들과 만날 명절을 이야기할 때 그는 특히 더 외롭다.

게다가 그는 이제 마음 속에 담아놓았던 가족들의 모습조차도 기억에서 가물거린다. 가난한 고국의 삶으로 인해 가족사진 한 장 없이, 온전히 기억에만 의지해서 그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이 기억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0여년의 기간 동안 가족들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도 이곳에서 아이를 낳았고, 벌써 그 아이가 만 3살이다. 가족 누구도 레오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몸과 마음은 벌써 한국사람이 다 되었는데, 레오니가 걱정이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자라고 있다. 레오니는 한국의 학교에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럴 수도 없다.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고향에 있는 전 재산을 팔아 한국에 왔다는 제임스에게는 이제 선택의 길이 없다. 고향에는 농사지을 땅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만한 일거리도 없다. 그저 힘들지만 이곳에서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다. 추운 겨울 제임스와 로지나, 그리고 레오니가 한국의 겨울이 혹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가슴 속 깊이 새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스럽다.

지난 2004년 국정감사 시 법무부에서 보고한 '불법 체류 외국인 현황' 자료에 따르면, 당시 국내에 체류 중인 단순 기능 외국인 인력은 모두 42만여명이며, 이중 불법 체류자는 43.1%인 18만1,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결국, 또 다른 제임스와 로지나가 18만여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며, 또 다른 레오니는 현재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과 기본 생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 결국 국가적 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중소업체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외국인 노동자들. 늦었지만 이들을 제도권 안으로 품기 위한 현실적이고 타당한 방안이 시급히 마련돼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화성뉴스(www.ihsnews.com) 1월 23일자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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