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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배낭여행을 하려면 야간열차가 필수다. 국경을 넘을 때 야간열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시간과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위험한 구간은 니스-이탈리아 구간, 프라하-뮌헨 구간이라 할 수 있다(스페인 국경을 넘나들 때도 위험하다고 한다).

니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야간열차는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고생한 하룻밤이었다. 열차에서 만난 여행객들로부터 들은 무시무시한 도둑 이야기 때문이다. 아무리 문을 잠그고 잔다고 해도 문틈으로 수면가스를 쏜 후 감쪽같이 귀중품들을 훔쳐간다고 하니 어찌 떨리지 않을 수 있으랴?

체인과 자물쇠를 잠갔을 경우 위험은 배가 된다고 한다. 결국 체인을 잘 보이지 않게 감고 전대는 풀어서 허벅지에 메고 잤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기차 칸에서의 잠은 '생존'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각박한 환경이었다.

▲ 야경이 빼어난 트레비 분수
ⓒ 정지언
그런 점에서 한비야씨는 대단해 보인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의 남아메리카 기행 편을 보면 몇날 며칠 트럭을 하이킹해서 목적지까지 갔다. 그런 용감한 여성도 있다고 스스로 다독거리며 잠을 청했다.

어느덧 빛이 들어오고 부산스런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이 온 것이다. 일어나서 일단 창밖을 내다보았다. 야간열차는 씻기 힘들고 잠자리가 불편하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그건 바로 국경을 넘어 새로운 나라의 환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달리는 기차에서 맞는 아침과 새로운 풍경들은 색다른 경험이라 할 만하다. 그 나라의 첫 이미지는 야간열차 안에서 그렇게 만들어졌다.

야간열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탈리아 풍경은 이국적이었다. 잘 다듬어지지 않고 어설퍼 보이는 자연환경이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농작물들이 한결같이 반듯하게 잘 다듬어진 프랑스 시골과 이탈리아 시골 풍경은 몹시 대조를 이루었다.

로마 떼르미니역은 소문대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이탈리아 소매치기를 의식하며 얼른 예약해놓은 숙소로 이동하였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였는데 호텔에선 흔쾌히 체크인을 해주었다. "이탈리아의 첫 이미지 아주 좋은데"라고 하며 신이 나서 깨끗하게 단장(?)하고 로마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유명 관광지보다 더 매력적이었던 시골 풍경

로마는 걸어서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처음 간 곳은 스페인 광장, 그 곳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푸름을 느낄 수 있는 공원도 아니고, 단지 계단과 분수(베르니니가 조각한 난파선 분수)밖에 없는 그 곳이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 하나만으로 유명해질 리는 없을 것인데…. 의아했지만 밤이 되니 스페인 계단의 매력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조명 아래 불빛이 은은히 퍼지는 그 곳은 참 낭만적이었다.

▲ 스페인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스페인 광장
ⓒ 정지언
바로크 양식이라는 트레비 분수의 인상은 화려함과 깨끗함이었다. 역시나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사진을 겨우 찍었다. 야경이 더욱 아름다웠던 트레비 분수에서 그만 씁쓸한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분수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경찰이 출두하고 만 것이다. 경찰까지 출두하여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분명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인데…. 아마 엄청난 벌금을 물었을 게다.

▲ 화려한 트레비 분수
ⓒ 정지언
이튿날 백포도주로 유명한 오르비에또에 갔다. 로마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가량 걸리는 곳이다. 성곽 도시라는 이색적인 도시 풍경을 가진 오르비에또는 그 곳에서 내려다보는 포도밭 풍경에서 절정을 이룬다.

▲ 오르비에또에서 내려다본 포도밭 풍경
ⓒ 정지언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을 올랐는데 비가 오는 것이 아닌가? 마침 도착한 버스를 타고 그 유명한 두오모(600년에 걸쳐 만들어진 대성당)에 갔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한 카페에서 맛 좋기로 유명한 오르비에또 클라시꼬(이탈리아의 유명한 화이트 와인)를 한 잔 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변덕 심한 유럽의 날씨를 프랑스에서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비가 그치리라 생각했다.

▲ 13세기 말부터 300년에 걸쳐 건축한 두오모
ⓒ 정지언
오르비에또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가이드 책이나 인터넷 자료가 불충분했다. 카페에 인상 좋아 보이는 중년 여성이 있어서 오르비에또 지도를 펴며 어디가 풍경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친절하게 코스를 설명해주었다. 자신도 영어가 서툴다며 반복해서 알려주기까지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 작은 집들이 올망 졸망, 오르비에또의 풍경
ⓒ 정지언
시골 마을의 집, 그 속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인 대화(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예쁜 집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다 듣고 말았다) 고즈넉한 골목길과 높은 언덕의 도시에서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밭, 황토색으로 깔린 흙 밭과 어울리는 푸른 포도밭 정경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이 스페인 계단이나 트레비 분수 등의 유명 관광지보다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 나도 정혜신씨가 말한 내향형 인간이란 말인가? 유명하고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관광지보단 내 감성을 자극하는 풍경에 매료되고야 마는 나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융은 심리학적 유형의 하나로 인간을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구별하였는데, 그들은 주체와 객체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어떤 사람의 행동과 판단을 결정하는 기준이 주로 객체에 의한 것일 때 그의 태도는 외향적이며 반대로 객체보다도 주체에 의해 결정되면 내향적이라고 한다.(정혜신의 심리 평전Ⅱ 사람VS사람, 140쪽)

흔히 여행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나는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던 것일까? 사실 무엇, 무엇을 얻었다고 단정 짓지는 못하겠지만 어렴풋이 느껴진다. 자신에게 속삭였던 그 무수한 생각들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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