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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경의 남쪽'에서 주연 맡은 차승원.
영화 '국경의 남쪽'에서 주연 맡은 차승원. ⓒ 싸이더스 FNH
<태극기 휘날리며>의 하이라이트 장면중의 하나인 장동건의 약혼자가 인민재판을 받는 장면이 신문사 사무실과 5분 거리도 채 안 되는 전주시 남노송동 옛 전문대학교 자리였다는 사실도 영화를 보고 난 후에야 알았으니 얼마나 무관심했던가. 참으로 민망하다.

십수 년 넘게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지만 사회부와 경제부만을 오가며 현장을 누비던 나로서는 문화부 기자들이 연신 품어대던 ‘영화계 메카’로 지역이 부상한다던 기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

후배 기자들에겐 늘 “정치, 경제, 사회적인 현상과 문화계 등 전반적인 분야까지 두루 섭렵해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건만 내겐 늘 사각지대였다. 단 한 번도 문화부를 거쳐보지 못하고 외길만 고집하며 달려온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올 해는 문화계에 보다 관심을 갖기로 했다. 그동안 간과했으나 놀라운 사실들이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뒤 늦게 깨닫게 된 동인이 주어진 게 그나마 다행이다.

요 며칠 전 취재를 마치고 전주시 송천동에 소재한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을 우연히 찾았다가 낯익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인데 순간 이름이 기억에 나지 않는 것이다.

우연히 마주친 ‘국경의 남쪽’ 제작팀, ‘인터뷰 해, 말아?’

'국경의 남쪽' 촬영이 한창인 전주시 도심,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
'국경의 남쪽' 촬영이 한창인 전주시 도심,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 ⓒ 박주현
소리문화의 전당 관계자에게 다짜고짜 물으니 “배우들과 감독이 일주일째 <국경의 남쪽>이란 영화촬영을 위해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차승원의 첫 번째 멜로영화로 주목받고 있는 이 영화는 지난해 가을부터 촬영이 진행돼 현재 막바지 촬영을 하고 나면 올 4월쯤엔 개봉된다고 한다.

“혹한 속에서도 한 편의 작품을 완성 짓기 위해 제작팀들이 열띤 촬영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안쓰럽기까지 하다”는 이 관계자의 말이 처음엔 실감나지 않았다.

그러나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 출연자들이 줄지어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추운 야외에서 휴식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들여다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래 맞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 사람은 바로 어느 영화 속 주인공이었던 차승원이 분명했다. ‘말을 걸어 말아?, 아니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인터뷰를 해, 말아?’

온갖 말초신경이 곤두서며 취재욕이 솟구쳤지만 이내 이들은 다시 촬영을 위해 실내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일사불란한 군대 야외훈련장을 보는 것 같아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면면을 살펴보니 더욱 흡사했다. 매 순간마다 감독의 제스처와 구령에 의해 조율된 인형들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 안쓰러울 정도였다.

<한반도>, <열혈남아> 전주시내 일원서 열띤 촬영

영화 '잘 살아보세'의 주인공 김정은 산아제한을 위해 파견된 보건소 직원으로 변신했다.
영화 '잘 살아보세'의 주인공 김정은 산아제한을 위해 파견된 보건소 직원으로 변신했다. ⓒ 굿플레이어
다른 배우들과 감독들이 내일이면 또 찾는다는 문화의 전당 홍보 관계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주시 영상위원회를 향했다. 보다 구체적인 자료와 상황파악이 필요했던 것이다.

통일을 앞둔 한반도에서 펼쳐지는 국가적 위기와 갈등을 다루는 픽션 영화 <한반도>(감독: 강우석, 주연: 차인표, 조재현)도 전북도청사와 전주인근 산업단지에서 지난해 10월부터 촬영 중인 것을 비롯해 다작이 로케중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정범 감독이 마이크를 쥔 <열혈남아>(주연: 설경구, 조한선)도 지난해 12월부터 촬영에 들어가 전주시 일대가 로케이션이라는 사실도 뒤 늦게 알 수 있었다. 지난해 전북지역서는 <청연> 외 35편의 영화와 <친절한 금자씨> 외 11편의 드라마가 촬영됐다.

올해도 연초부터 13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 중이다. 전주영상위원회에 따르면 2001년 전북에서 찍은 장편영화는 4편에 불과하던 것이 2002년 17편, 2003년 19편, 2004년 26편, 2005년 35편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전북이 영화촬영의 메카로 부상하는 이유는 뭘까. 산과 바다 들판 등이 가까운 거리에 밀집돼 있어 이동이 쉽고 개발이 덜돼 1950년~70년대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 많기 때문이라고 전주영상위원회 관계자는 말한다.

‘왕의 남자’ 알고 보니 어렵사리 부안 궁궐서 촬영

영화 '한반도'가 촬영중인 전주시 소재 전북도청사. 혹한 속에도 제작팀의 열기로 실내는 후끈 달아 올랐다.
영화 '한반도'가 촬영중인 전주시 소재 전북도청사. 혹한 속에도 제작팀의 열기로 실내는 후끈 달아 올랐다. ⓒ 박주현
아울러 행정의 적극적인 협조로 로케이션 장소와 교통 및 엑스트라 협조가 수월해 다른 지역에 비해 신속하고 집중적인 촬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최근 전국관객 500만명을 동원하며 연초 극장가에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왕의 남자>(제작: 이글픽쳐스, 감독: 이준익, 주연: 감우성, 정진영)에 관한 기막힌 사연도 알아냈다.

‘왕의 남자’의 장소 중 제일 중요했던 것은 궁궐이었다고 한다. 영화제작팀은 자체적으로 서울의 경북궁 등 궁궐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문화재청에 공문을 발송하고 촬영협조를 구했지만 문화재로 지정이 된 곳에서 훼손우려가 많다는 이유로 촬영을 거부당했다고 전주 영상위 관계자는 전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궁궐촬영은 필수였던 영화팀에게 부안영상테마파크의 궁궐세트장은 그야말로 보물 같은 곳이었다고.

<불멸의 이순신> 촬영을 위해 KBS 아트비전과 전북도, 부안군이 제작비를 투입한 부안영상테마파크에서 ‘왕의 남자’가 성공리에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이 영화의 흥행돌풍에 전주 영상위 관계자들이 싱글벙글해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새만금, 방폐장에 의제 가린 영화소식들 못내 아쉬움

이 외에도 <바람난 가족>, <황산벌>, <광복절 특사>, <말죽거리 잔혹사> 등 유명 영화가 전북지역에서 촬영됐다.

그동안 전주국제영화제와 각종 영화계 소식을 전담해 왔던 문화부 기자들은 그동안 무얼 했나? 라는 생각이 머릴 스친다. 이런 대중친화적인 기사거리를 굳이 문화면에만 부각시키려 했던 지역신문 편집국 간부들의 구태저널리즘에 묻혀온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본다.

한국판 할리우드를 꿈꾸는 지역의 중소도시가 영화촬영의 메카로 부상하고 있음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그동안 단 하나의 대기업 유치와 새만금 또는 방폐장 사업에 목을 매는 정치인들과 자치단체장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여 온 내 자신이 얄밉게 느껴진다.

영화산업이야말로 지역경제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을 수 있는 굴뚝 없는 무공해 산업인 것을 왜 지역 언론사들은 의제선택에서 뒤로만 내몬 것일까.

구태와 관행에 찌든 편집방향과 나와 같은 무지와 무관심이 독자들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되레 눈과 귀를 막지 않았나, 재삼 반성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자료사진은 전주영상위원회에서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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