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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린돈, 뒷돈, 촌지, 성의 표시, 인사, 기름칠... 뇌물을 뜻하는 말도 참 많습니다. 사진 제공: <평화뉴스>(www.pn.or.kr)
구린돈, 뒷돈, 촌지, 성의 표시, 인사, 기름칠... 뇌물을 뜻하는 말도 참 많습니다. 사진 제공: <평화뉴스>(www.pn.or.kr)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것을 넣어 뒀을까. 야근수당? 수고비? 격려금? 아니야. 그런 돈이라면 아무 말 없이 기록 속에 끼워둘 까닭이 없지. 그렇다면, 이게 말로만 듣던?…….'

그것은 바로 자기 사건을 신경 써서 신속하게 잘 처리해 달라는, 이른바 '급행료'였습니다. 그때는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라 야근을 할 만큼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직원은 몇 푼 받은 걸로 당사자와 상급자 양쪽에서 혹독하게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누가 돈을 싫어하겠습니까마는 나를 옭죌 수도 있는 그런 돈은 사양하고 싶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봉투를 넣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법률사무소에 전화해 다시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그 일 이후 한동안 저는 사건 기록을 넘기는 게 겁이 났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하얀 봉투가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집에 갈 때 빵 사먹으라고요?

2003년 봄, 제가 민사재판 업무를 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 한 중년 남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찾아왔는데, 사건의 피고였던 그는 "내가 왜 소송을 당했는지 자세히 좀 알고 싶다"며 하루 종일 재판 기록을 살피더니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갔습니다.

그는 다음날도 찾아와서는 변호사에게 사건 의뢰를 하겠다며 이번에는 방대한 분량의 사건 기록 전체를 복사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먼저 처리할 일도 많고, 다른 민원인들과의 형평성도 있으니 복사하려면 며칠 걸릴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겐 정말로 중요한 일이니 빨리 좀 해 달라"고 재차 부탁했습니다. 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루 더 야근하는 셈 치고 그날 그 많은 분량을 복사해 주었습니다. 복사한 사건 기록을 받아든 그는 내심 미안했던지 "고맙다"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더니 주위를 살피며 멈칫멈칫하다가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내미는 게 아닙니까.

"집에 갈 때 빵이라도 하나 사서 들어가세요. 고마워서 성의를 표시한 거니 오해는 마시고요. 절대 뇌물이 아닙니다."

당황한 저는 웃으면서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라고 한 뒤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젠 이런 일로 공무원들이 욕을 먹는 일은 없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몇 년 안에 집 못 사면 바보?

지금은 퇴직한 노선배들은 술자리에서 멀게는 수십 년 전 가깝게는 십수 년 전까지, 한때 화려했던 시절에 대한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일단 구속되면 고달프잖아. 돈이 얼마나 들건 제발 나오게만 해달라는 거지. 내가 근무할 땐 피고인이 보석으로 나오면 변호사 사무실에서 담당 직원에게 감사 표시(?)를 하기도 했어. 내가 뭘 한 것도 아닌데 고맙다 길래 몇 번 받았지."

"우리 때는 컴퓨터도 없었어. 그러니 사건 처리가 얼마나 늦어? 밖에서는 빨리 좀 해달라고 아우성이지. 아쉬운 사람들은 한 건 처리하는 데 얼마씩 주겠다고 돈을 들고 찾아와. 어떤 직원은 그 돈 받고 밤늦게까지 처리해 주기도 했다더라고."

"지금이야 업무량이 적당한 부서를 선호하지만 예전엔 달랐어. 소위 '물 좋은 자리'에 가기 위해 물밑으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지. 그런 자리 가서 몇 년 안에 집을 못 사면 바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어."


권노갑씨의 현대비자금 수사 때 현금 50억 운반을 재현하고 있는 장면. 국제투명성기구가 2년마다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우리나라는 133개 국 중 50위, 뇌물공여지수(BPI)는 20개 국 가운데 18위에 머물렀습니다(2004년).
권노갑씨의 현대비자금 수사 때 현금 50억 운반을 재현하고 있는 장면. 국제투명성기구가 2년마다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우리나라는 133개 국 중 50위, 뇌물공여지수(BPI)는 20개 국 가운데 18위에 머물렀습니다(2004년).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런 말이 비단 법원에만 있는 건 아니었을 겁니다. 세무, 검찰, 경찰, 건축, 각종 인허가 업무처럼 재량이 발휘되는 일을 하는 공무원들에게는 끊임없이 검은 돈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공무원 관련 기사는 안타깝게도 '검은 돈'과 관계되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공무원인 저는 화도 나고 수치심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비리의 당사자인 것처럼 낯부끄럽기도 하고 저를 보는 민원인의 눈빛이 곱지 않을 땐 "너도 똑같은 놈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봉투가 인사를 다하네~ 구린 돈, 그만!

하지만 다행히 적어도 제 주위에서는 뒷돈을 바라는 '간 큰 공무원'은 보지 못했습니다. 직장 분위기도 금전 부정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돈과 관계되는 말이 참 많습니다. 더럽고 추접하다고 '구린 돈', 앞에서 떳떳하게 주고받지 못해서 '뒷돈', 급한 마음에 빨리 처리해 달라며 주는 '급행료'.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려고 '기름칠'하는 사람도 있고 명절도 아닌데 '떡값'을 쥐어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기하게도 고개가 아니라 봉투가 '인사'를 하기도 합니다. 기름칠도 하고, 인사도 하고, 떡도 사먹고, 그 표현만 보면 참 좋지만 결국에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얼마 전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에는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직원이 근무하는 공간에 민원인이나 법률사무소 직원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고 개인 책상의 책꽂이와 캐비닛도 모두 치웠습니다. 애초부터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는 볼멘소리도 나왔지만 구린 돈 막으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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