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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의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는 멧돼지 새끼들의 귀여운 모습.
맹수의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는 멧돼지 새끼들의 귀여운 모습. ⓒ 강상헌
지금부터 '황우석 돌풍'에 잠시 우리의 관심권에서 멀어진 멧돼지를 변명하고자 한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멧돼지를 '헐뜯는' 많은 기사를 보게 됐다. 참 머쓱한 일, 멧돼지가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인간은 참 열없게 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친화적인 멧돼지의 본성에 대한 오해나 무지가 불러오는 이런 '적대감'은 참 멋쩍다. 아니 '그 영특한 인간'이 멧돼지를 이렇게 무서워하다니 하는 생각에서다. 멧돼지가 아파트 앞마당이나 한강으로 돌진하는 이유가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임을 모른단 말인가?

멧돼지 농장을 했던 이가 얼마 전 보여준 사진, 200kg은 너끈히 나갈 기세등등한 멧돼지가 여유 있게 제 '주인'을 등에 태우고 히죽 웃고 있는 그 모습에서 멧돼지와의 정(情)의 교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말을 들어보니 역시 멧돼지가 나긋나긋하지만은 않더라는 데, 그 '멋진 녀석'이 흡사 강아지처럼 응석을 떤다면 징그럽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끝내 이들을 '순한 양'으로 '발명'해냈다. 삼겹살을 제공해주는 돼지의 원종(原種)이 바로 멧돼지 아닌가.

사육멧돼지의 '씨'를 품은 숫컷 원종 멧돼지.
사육멧돼지의 '씨'를 품은 숫컷 원종 멧돼지. ⓒ 강상헌
호랑이와 살쾡이 따위가 자리 비운 산의 주인은 역시 멧돼지다. 그 빛나는 야성, 이미 우리 인간은 잃었고 잊었던, 그래서 한없이 목마른 그 야성, 야수성(野獸性)이 못내 부러웠던 것은 아닐까? 원초적인 질투일지도 모른다. 옹졸하기도 하지. 그래 멧돼지하고도 같이 못 사는 존재가 기껏 인간인가!

그런데, 막상 몇 개월을 땀 흘려 열매 맺게 한 농작물을 파헤쳐 못쓰게 만든 멧돼지 녀석(들)을 원망하는 농민의 표정을 살피면 이런 얘기의 현실성은 저만큼 달아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잘못'의 진짜 범인이 농민도, 그 녀석도 아니라는데 있다.

'멧돼지도 인간과 함께 지구를 잠깐 빌려 타고 있는 존재'라는 비교적 단순한 '진리'를 몰각(沒覺)하거나, 애써 기억하기 싫은 '문명'이 범인이 아닌가. 인간은 지구의 주인인가? 그렇다면 우주의 주인은 누구인가?

호랑이 똥, 더덕 줄기 따위가 멧돼지 피해를 막는데 효과가 있다고들 하지만 포수 등 '선수'들은 못 미더워 한다. "사람보다 영리하다"는 게 피해 농민의 푸념, 필자도 어릴 적 대밭에서 멧돼지들이 죽순을 까먹고 간 흔적을 본 기억이 있다. 더 부드럽고 담백하고 고소한 순(筍)은 먹고, 곱고 얇은 비늘 모양 껍질을 얌전히 벗겨 기념품 마냥 남겨둔 모습이 신기했다. 농사와 멧돼지 안녕의 균형점은 어디인가.

국보 제285호인 울산 태화강가 반구대의 한 바위 절벽 면에 새겨진 5천 년 전 추정 반구대의 바위그림에는 고래와 사슴과 함께 멧돼지가 뛰어 논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냥이라는 인간의 '먹이질'에 가엽게 쫒기는 모습일 터다.

한반도 선사시대 대표적인 유적인 이 바위그림이 넌지시 인간과 멧돼지와의, 또 다른 생명과의 교섭(交涉)의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내 건다. '더불어 살기'다. 멧돼지도 사라진 산과 들에서 인간이 활개치고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계곡은 옹달샘이 있어 아름답다.

카슨(Rachel L. Carson, 1907~1964)의 예언자적 역작 <침묵의 봄>이 이미 오래전에 간파한 사안이다. 우리는 아직도 애써 외면한다. 그러면서 모두 제 편한대로의 '원인분석'과 '처방'을 내놓는다. 만물(萬物)에 대한 외경(畏敬)이 진정한, 유일한 처방이 아닐까? 살아있는, 또는 숨이 없는 물질까지도 두려워하고 우러러보는 경건함 말이다. 추상적인 것이 어쩌면 더 또렷한 법, 내친 김에 원인도 거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카슨이 이미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한 숨 지었던 일, 봄이 와도 싹이 나지 않는 '진짜' 무서운 상황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여러 노고의 힘이겠지, 많은 조짐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파국은 없었다. 더구나 경사스러운 일은 우리 숲 속에 멧돼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걱정스럽기만 한 일인가?

멧돼지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아니다. 반론이 없을 수 없겠으되, 멧돼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반대의 상황인 것이다. 멧돼지 무리가 그 삶을 기대는 영역, 그들이 부비고 살아야 할 터전에 다리 아파트 철탑 따위의 생명친화적이지 못한 시설들을 설치하는 것이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구분이 안 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갈 곳 잃은 멧돼지 떼는 인간의 영역으로 자주 행차(?)할 것이다.

멧돼지들은 컴퓨터나 GPS(위성항법시스템)를 가지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을 물에 빠뜨리고, 총의 과녁 삼아 그들의 숨을 끊기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살 길을 터줘야 한다. 또 어쩔 수 없어 죽는 녀석에게는 진정한 연민을 가져야 한다. '더 큰 미래'의 우리의 자손에 대한 빚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생명시대신문>(www.lifereport.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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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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