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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유력 매체 <으후트레흐트>의 인터넷 판에 실린 베로니카의 죽음에 관한 기사.
에스토니아의 유력 매체 <으후트레흐트>의 인터넷 판에 실린 베로니카의 죽음에 관한 기사.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소녀 베로니카 다리(Veronika Dari)는 수도 탈린의 중심가에 있는 러시아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지난 10월 7일 아침, 등굣길에 학교 정문을 불과 400m 남겨둔 사거리에서 총성이 울렸고 베로니카는 쓰러졌다.

머리에 총상을 입은 베로니카는 즉시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애석하게도 그날 저녁 사망하고 말았다. 베로니카의 총격 사망 사건으로 에스토니아의 일간지에서도 다룰 만큼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탈린 인구 중 40% 정도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가정의 셋째 딸로 태어난 베로니카는 금발머리를 한 미모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좋아 학교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친구들은 베로니카가 예쁘고 쾌활했으며 그림에 소질있던 꿈 많은 소녀였다고 전했다.

10월 13일 있었던 베로니카의 장례식의 식장 한 편에서는 죽기 2주 전 학교에서 떠난 단체 여행에서 촬영한 비디오가 상영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해맑은 얼굴의 베로니카는 파란 눈동자를 카메라로 향한 채 러시아어로 "사랑!"이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바딤 다리씨는 화장을 원했지만 러시아정교회는 화장을 금하고 있어 묘지에 안장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죽은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면 하느님의 신부가 된다고 믿기 때문에 베로니카는 하얀 드레스와 함께 묻혔다.

누가 베로니카를 쏘았을까

베로니카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미스터리'를 안겨주었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한 것은 누가 베로니카를 쏘았냐는 것.

언론과 사람들은 베로니카가 원한 때문에 총격을 당했다기보다는 범죄의 불운한 희생물이 되었을 거라고 보고 있다. 베로니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고 아버지인 바딤씨 역시 평범한 사업가였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

<으후트레흐트> 등 주요 일간지는 베로니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총구는 에스토니아 국립부동산관리소 소장 티트 오티스(Tiit Ottis)를 겨누고 있었다고 추측했다.

범행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던 오티스는 사건 당시 집 앞 문가에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베로니카가 쓰러지자 곧장 달려가 긴급구조를 청했다. 오티스가 운영하는 국립부동산관리소는 탈린의 건물 70% 이상을 관리하며 리투아니아에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거대한 국영기업 중 하나다.

경찰은 베로니카 사건은 오티스 소장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며 저격범들은 살인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건 발생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찰은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베로니카의 아버지가 딸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러시아에서 사설탐정까지 고용했다는 소식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죽음을 예감한 베로니카... 그녀는 알고 있었다?

또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가슴을 놀라게 한 것은 베로니카가 죽기 전에 보였던 여러 가지 징후들이었다.

베로니카의 부모가 <으후트레흐트>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베로니카는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닥칠 것임을 예감했던 것처럼 보인다. 사건 발생 하루 전인 목요일 오후 베로니카는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다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 학교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모범생 베로니카가 말이다.

결국 금요일 아침 평소보다 늦은 시간 일어나 항상 타고 다니던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와 함께 정류장에 도착하자 버스는 막 떠나고 있었고 버스에 타고 있던 친구들은 베로니카에게 정겹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것이 친구들이 기억하는 베로니카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아름답게 떠나는 법 보여준 16세 소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문학동네
딸의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아버지 바딤씨는 딸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가 발견한 것은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스물네 살의 베로니카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고 자살을 시도한다. 네 통의 수면제를 삼켰지만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눈을 뜬다.

이제 베로니카에서 남은 시간은 단지 일 주일뿐. 자신에게 놓인 일주일 남짓한 생의 시간 동안 베로니카는 삶과 죽음, 사람들에 대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대략적인 줄거리


바딤씨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그때 책을 보고 경험한 충격은 이루 말한 수가 없다. 인생이란 게 왜 이토록 이상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날 것 같으면, 인생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주지만,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생각한 데는 죽기 전 베로니카가 한 말 때문이었다. 장기이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 사람을 다룬 TV 다큐멘터리를 본 베로니카는 자기도 죽게 되면 꼭 장기를 이식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그 말대로 베로니카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베로니카의 콩팥은 22세, 35세 남자들에게 기증됐고 각막과 안구는 한 살 반과 다섯 살이 된 아이들에게 기증됐다.

수술은 모두 성공적으로 끝났다. 동맥도 기증했지만 아직 기증 대상자가 결정되지 않아 보관하고 있다. 바딤씨는 "딸이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서 여전히 살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불의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16세 소녀 베로니카의 이야기가 에스토니아 사람을 울리는 건 그 미스터리와 신비로움 때문은 아니다. 아름답게 세상을 떠나는 법을 보여준 베로니카와 그 가족들이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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