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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이정표 ⓒ 정성필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 텐트를 쳤던 곳을 보니 도저히 텐트를 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사방이 산죽 군락지였다. 나는 산죽이 뾰족뾰족한 곳에서 잤으니 잠자리가 편할리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온통 아픈 곳 투성이였다.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두껍게 느껴졌고 손은 계란을 쥔 것처럼 둔하게 느껴졌다. 아마 거울이 있었다면 내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끔찍할 만큼 부었으리라 생각된다. 사방에는 나무가 우거져있다. 나무 그늘 때문에 아침 햇살이 나무의 높은 곳에 걸려 서성이고 있다. 일단 이곳을 빠져 나가야 몸이 회복될 것 같아, 아침도 거른 채 움직이는 일부터 했다.

일단 걷기 시작하니까 몸은 점차 정상으로 회복된다. 땀을 흘리고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몸을 움직이니까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몸이란 이상하다. 산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일단 움직이면서 땀을 흘리며 걷다보면 몸은 회복된다. 오늘만이 아니다. 걷는 동안 내내 피로와 탈진상태까지 갔다가도 걷다보면, 땀을 흘리다보면 회복되곤 한다.

멀리 비행기 사격 훈련장이 보인다.
멀리 비행기 사격 훈련장이 보인다. ⓒ 정성필
오늘도 회복되는 경험을 한다. 오늘은 태백산에서 화방재까지 가기로 한다. 태백산 정상까지 가는 길, 비행기의 굉음을 들어야했다. 폭격을 하는 소리와 비행기의 낮은 포복 같은 저공비행 소리 그리고 폭발음을 들어야 했다. 끔찍한 경험이다. 저렇게 많은 폭탄이 하필이면 백두대간에 떨어져야할까? 생명의보고인 백두대간에 사는 짐승들은 내가 놀라는 것 이상으로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이 땅에 전쟁 연습이 필요 없는 평화가 빨리 정착하기를 소원하며 걷는다.

두 시간쯤 가다보니 산중에 텐트를 여러 동 칠 만큼 넓은 안부가 있었고 안부에는 플라스틱 페트병에 누군가 매직글씨로 좌측에 물 있음이라 써놓았다. 아침도 먹지 않았고, 간밤 늦은 시간이었고 물이 부족해 씻지 않은 나는 물을 찾아 나섰다.

배낭을 안부 좌측 풀 섶에 놓고, 코펠과 물통을 들고 안부에서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니 개울이 있다. 물이 흐른다. 물의 양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먹을 물을 받고, 코펠을 바가지 삼아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땀으로 끈적해졌던 몸을 백두대간의 차갑고 맑은 물로 닦아내는 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코펠에 물을 가득 채우고, 물통과 함께 양손에 들고 안부로 오른다. 깨끗하게 닦은 몸에서는 순식간에 땀이 비오듯한다. 씻으나 마나. 하지만 몸은 안다. 청결이 얼마나 유익한지. 안부에서 간밤에 남겼던 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다시 한 숨 잔다. 간밤에 부었던 몸이여 회복되어라.

잠간의 잠을 잔 후 일어나 걷는다. 태백산 가는 길은 계속 트래버스(정상을 오르지 않고 정상을 비껴 지나가는 길)했고 길은 평탄했다. 가끔 산죽군락지나 산나물 군락지가 펼쳐져있었다. 가는 길에 신기하게도 붉은색의 개구리를 본다. 사진을 찍는다. 점심때가 되자 비행기 소리도 작아진다.

빨간 개구리
빨간 개구리 ⓒ 정성필
태백산이 가까워오자 탁 트인 시야가 나타난다. 밀림과 같은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다 시야 가득히 초원과 같은 태백산의 능선길이 나오자 감동을 한다. 정말 아름답다. 정상 가는 길은 내내 눈이 즐거울 정도로 아름다운 초원과 같은 풍경의 연속이었다. 태백산 정상 직전에는 사람들이 야영을 했던 흔적이 많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태백산 정상을 오른다. 정상에서 보는 파노라마는 백두대간을 걷는 즐거움과 행복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정상의 천재단을 배경으로 태백산에 오른 산행팀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 한다.

멀리 천제단이 보이고
멀리 천제단이 보이고 ⓒ 정성필
정상에서 좌측으로 보니 비행기가 낮게 날며 폭격을 하는 폭격장이 있었다. 구룡산 못 미쳐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비행기 소리가 심하게 들렸나 보다 .

태백산 정상에서 유일사쪽으로 내려간다. 오후 2시 가장 뜨거울 때다. 유일사 내려가다 날씨가 너무 뜨거워 잠간의 햇살을 피하기로 한다. 내려가는 길 주목 군락지 옆에 사람들이 밥 먹는 장소로 사용했을 법한 넓은 장소가 있어, 주목 그늘 아래 메트리스를 깔고 또 눕는다.

태백산 정상에서
태백산 정상에서 ⓒ 정성필
걷고 싶으면 걷고 쉬고 싶으면 쉬며 가는 이 편안함과 자유로움, 나는 뜨거운 햇살을 피한다는 핑계 삼아 살아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는 주목아래서 찰나의 잠을 잔다. 아, 꿀 맛 같은 잠. 아무래도 몸이 잠을 계속 필요로 하나보다.

화방재로 내려가는 길은 길고 지루하다. 전망도 좋지 않았으며, 길은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훼손정도가 심했다. 나무는 뿌리를 드러낸 채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흙을 악쓰듯 움켜쥐며 사람들의 발치를 견디고 있었다.

태백산은 관광지여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청바지나 면소재의 티셔츠의 차림이 많았다. 단체로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속으로 비라도 내리면서 바람이 불면 저 사람들은 위험에 빠질 텐데, 날씨가 맑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화방재를 향해 내려간다.

태백산 주능선
태백산 주능선 ⓒ 정성필
화방재로 내려가는 길 유일사 매표소를 지나 조금 걷자 매우 급한 경사도의 내리막길이 나온다. 내리막길 우측에 주유소가 있었고 민박집이 있었다. 나는 민박을 하기로 한다. 따듯한 방에서 등짝을 지지며 편하게 자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민박에 들어간 후 씻고 나자 태환형이 생각났다. 태백산 오면 전화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태환형에게 전화를 하니 연결이 된다. 태환형은 지금 태백시에 있다 한다. 내일 피재까지 갈 때 길이 험하니 배낭은 민박집에 맡겨놓고 가면 내일 피재까지 픽업해주겠다 한다. 고맙다. 내일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따듯한 방에서 푹 잔다. 몸이 많이 피곤했다. 정신없이 잠으로 빠져든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종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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