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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석이란 말에 공연장 로비는 웅성거린다. 자유석이란 곧 선착순이란 말이다. 일순간 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결국 그 꼬리를 찾을 수 없는 진풍경이 공연 10분 전까지 벌어진다.

'연극이 다 그렇지, 뭐'라는 불만섞인 푸념도 들려온다. 드디어 입장. '역시 연극판은 체계가 없다'던 관객은 입이 벌어진다. 화장실 다녀올 때도 줄에서 이탈할까봐 자리를 맡아달라던 사람들은 이내 맥이 풀린다.

직사각형의 무대가 중앙에 자리잡고 사방을 가득 메운 간이 의자들은 무대를 우러러보고 있다. 큰 산과 같은 무대가 펼쳐졌다 하여 산대놀이라 불렸다는 우리의 전통연희가 떠오르는가 하다가도 배우들이 오갈 때면 첨단 유행을 엿볼 수 있는 패션쇼에 온 듯한 기분이 교차한다.

어디에 앉아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된 관객들은 이후 90여 분간 한 인간이 결국 왜 자신의 본모습을 버릴 수밖에 없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보는, 더 정확히 말한다면 방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극단 여행자의 연극 '서울착한여자'는 이렇게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원작인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착한 사람'을 '서울'로 가져와 내용도 절반을 뚝 잘라내더니 자시보살, 구렁이 설화, 여신 '사티'와 '칼리' 등 불교, 동양구비문학, 인도신화 등을 버무려 아예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원작의 배경인 중국 사천을 한국의 서울로, 주인공 셴테를 순이로 바꾼 것은 최근 성황리에 끝난 연극 '주머니 속의 돌(아일랜드 -> 강원도)'을 떠올리게 했고, 원작의 내용 중 신에게서 받은 재물로 푸줏간을 낸 창녀출신 순이가 결국 마을사람들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버림받는 과정을 따로 떼내 극명하게 조명한 부분은 톰 스토파드의 희곡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한 부분을 떼내 새로운 희곡으로 만듦)'와 닮았다.

모르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원작을 알고 보면 재미는 두배다. '착하게 살라'는 신의 계시와 함께 많은 돈을 받은 '착한' 여자 셴테는 마을 사람들의 계속되는 속임과 구걸로 결국 파산 직전에 이른다.

급기야 그녀는 가상의 사촌오빠 '슈이타'로 분장하고 똑같이 사람들을 속이고 억압하면서 부를 축적한다. 이 정도의 내용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이 연극은 셴테 아니 '순이'가 파산 직전에 처한 상황까지만 다뤘으며 그렇기 때문에 '착한' 여자가 얼마나 악하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극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물론 연출가는 이런 선과 악마저 실은 하나임을 사랑의 신 '사티'와 파멸의 신 '칼리'의 극중극을 통해 암시하지만 말이다.

원작과 비교하는 재미는 극중 '순이'의 가게에도 있다. 원래는 '담배가게'였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돈 꽤나 벌었다는 사람이 처음 여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배는 결국 인간을 해롭게 한다. 따라서 '선의'를 지니고 아무리 판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가 선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이 희곡이 제기하는 '착한'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의 시발점이 된다.

'서울착한여자'에서 순이는 담배가게가 아니라 푸줏간을 차린다. 왜 하필 푸줏간인가? 연출가는 사시사철 피가 뚝뚝 떨어지고 날카로운 칼로 살점을 도려내는 여주인이 그 선한 본성과 관계없이 이미 '피'에서 비롯하는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과 '칼'의 금속성에서 기인하는 폭력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암시하려는 것은 아닐까?

결국 순이가 평소 선의를 베풀었던 마을 사람들에게 구타당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버려진 곳이 그녀의 푸줏간 도마 위였음은 이런 추측에 더욱 힘을 싣는다.

한편, 함축성은 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보다는 몸짓이 앞서는 이 연극은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매력을 풍긴다. 가령 비행사를 꿈꾸다 좌절한 청년은 그의 자살을 결정적으로 막은 순이에게 비행기와 비행의 아름다움을 입이 아닌 온 몸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관객은 그 장면을 보면서 청년이 지닌 간절함, 욕망 등을 읽어냄은 물론 '나도 그런 꿈을 가졌었지' 혹은 '지금 내 삶은 과연?'하며 시를 읽듯 풍부한 행간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다.

극단 '여행자'가 유난히 해외초청(이 극단은 일본, 이집트 등지에서 공연했으며 내년 6월에는 셰익스피어 작품 '한여름 밤의 꿈'을 들고 셰익스피어 연극의 본고장 영국, 거기서도 심장부인 런던의 바비컨 센터에서 공연을 올린다)을 많이 받는 이유도 언어를 넘어 공감의 폭을 넓힌 데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이는 연출의 의도도 중요하겠지만 배우들의 잘 훈련된 신체와 발성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할 것이다.

극 초반, 순이에게 귀한 구슬을 줬던 신은 말미에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그 구슬을 관객들에게 내민다. 그 구슬을 받은 관객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을까? 그 관객은 결국 그 자신이 '순이'이며 또한 우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이즈음 복권에 당첨됐던 사람들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았다는 뉴스가 갑자기 떠오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간 편안한 좌석에서 공연을 즐겼던 서강대 메리홀의 기억이 수정되는 이색적인 경험에다 이런 의문까지 추가되면서 공연장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날따라 서울 거리는 유난히 춥고 스산했다.

'서울착한여자'는 18일 일주일간의 공연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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