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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치 이정표
마당치 이정표 ⓒ 정성필
마당치를 지나 고치령까지는 길은 뚜렷하다. 일찍 출발한 탓인지 10시 조금 안되어 고치령에 도착한다. 너무 일찍 도착하기도 했고 피곤해서 산신각 옆 잔디밭에 누워 한숨 잔다. 자고 일어나니 11시다. 정말 피곤했나 보다. 잠깐 잔다는 게 긴 잠을 잤다.

잠을 잔다는 거, 쉰다는 것은 산에서는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세상에서는 일하다가 잠을 잔다거나 휴식하면 손해다. 까먹는다. 그렇게 해서는 남을 따라 잡을 수 없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잠시 쉬어가더라도, 한숨 자고 가더라도 상관없다.

하루 이틀 걸을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 걷고 또 걸으려면 휴식도 잠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지금 서두르고 지금 다그쳐서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이 걷더라도 오늘보다 내일 훨씬 더 많이 걷더라도 결국엔 몸이 견디어내질 못하기 때문에 끝까지 가질 못하게 된다.

낮잠잤던 곳
낮잠잤던 곳 ⓒ 정성필
산에서는 느긋함을 배워야 한다. 느긋하게 걸어도 결과적으로는 다른 사람 가는 만큼 다 간다. 급하게 먼저 가더라도 언젠가는 다 만난다. 나 같은 느림보 거북이에다 달팽이 걸음도 태환형을 세 번이나 만났다. 이렇게 쉬었다 가더라도 태환형을 또 만날 것이다. 태환형과의 세 번째 만남이 나에게 준 교훈이다. 느림이 산 아래서는 지탄 받을 짓인지 몰라도 산에서는 느림만큼 확실하게 끝까지 가는 방법은 없다.

백두대간을 끝내고 산행할 때 사람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많이 한다. 백두대간을 연속 종주한 사람이니 소위 '선수'라고들 오해한다. 산에 다니는 분들 가운데는 '선수'와 선수 아닌 사람들로 나누어 선수, 즉 산행에 있어서 걸음이 무척 빠른 사람들은 산을 정말 프로처럼 다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느린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산에서는 결코 선수가 없다. 선수는 경기장이 있어야 한다. 경기장에는 관중이 있어야 한다. 선수는 반드시 순위를 가려야 한다. 선수는 성적에 따라 최우수, 우수상, 신인상 후보도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산은 경기장이 아니다. 산은 함께 하는 공간이지 관중 따로 선수 따로 없다.

산에 오르면 누구나가 다 산에 있는 사람일 뿐이지, 산에 있는 사람이 산 아래의 기준처럼 선수가 있고 선수 아닌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분하자면 산을 알고 산의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 산을 체계적으로 배워 등반을 하는 산악인이 있을 뿐이다.

산악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걸음이 얼마나 빠르냐 아니냐의 속도 문제는 아니다. 산에서 속도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산 아래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산에서는 산의 깊음과 산의 여유로움을 배워야 한다. 속도는 산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들의 판단일 뿐이다.

나는 백두대간을 끝낸 후 몇몇 산악회 분들과 함께 산행을 했다. 그분들은 내가 무슨 경쟁 상대인 것처럼 나를 속도에서 이기면 마치 백두대간을 정복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기를 쓰고 나를 앞질러 가시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나보다 더 빠를 뿐이지 결코 백두대간을 정복한 것은 아니다. 안타까울 뿐이다.

고치령
고치령 ⓒ 정성필
나는 낮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기까지 멍한 상태로 잔디밭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보며 햇빛의 무게에 못 이겨 스르륵 이파리를 눕히는 나뭇가지를 보며 일어나 고치령 샘터로 향한다. 샘터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가끔 지나가는 차 때문에 먼지가 뿌옇게 일어난다.

물 있는 곳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편하기 때문에 점심을 준비한다. 샘터 옆에 코펠을 꺼내 쌀을 씻어 앉힌다. 코펠을 열어 밥 냄새를 맡는다. 밥 냄새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선린교회 사모님이 싸주신 반찬을 꺼내 밥을 먹는다. 밥 먹는 도중 차가 지나간다. 비포장 도로에 조용하게 누웠던 먼지가 일제히 소동 난 듯 하늘을 뿌옇게 만들다, 코펠 위로 가라앉는다.

결국 먼지 뿌연 길가에서 나는 밥을 먹고 있는 중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본다. 나도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본다. 이 산골까지 차타고 올라와 겨우 몇 미터 올라가 "야호"를 외치고 내려가는 저 사람들은 산을 다녀왔다고 일기장에 쓰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밥이 중요하다. 먼지가 이는 이 땅에서 밥을 먹는 나를 거지라 생각해도 좋다. 이상한 사람이라 여겨도 좋다. 어차피 내 몰골은 먼지 뒤집어 쓴, 햇빛에 새카맣게 탄 거지 중에 상거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차를 타고 산을 오르고 후다닥 내려가는 그대들 보다 어쩌면 더 느긋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일 테니까, 느긋한 만큼 나는 여유가 있으니까, 나는 먼지를 반찬삼아 먹어도 행복해.

밥을 먹고 있는데 노신사 한 분이 오신다. 먹던 밥이라도 함께 하시겠냐고 권했더니 웃으신다. 웃으면서 산행하냐 물으셔서 백두대간 중이라 대답 하니, 어른께서 반갑다 인사를 건네 주신다.

당신의 아들도 군대 갔다 와서 백두대간을 했고 지금은 교수가 되었단다. 산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고 백두대간 하는 사람치고 의지가 약한 없으니 젊은이도 꼭 성공하고 세상에서도 성공하라 격려해주신다. 힘이 솟는다. 나를 젊은이로 보아주신 노신사께도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마구령
마구령 ⓒ 정성필
밥을 먹고 마구령을 향해 간다. 마구령에는 심마니 세 사람이 쉬고 있었다. 심마니들과 인사를 나누니 백두대간 하시느라 고생이 많다며 격려해주신다. 당신들은 배낭만 보면 일반산행인지 백두대간 종주자인지 안다는 것이다. 그 분들은 드시던 김밥 한 줄을 내게 주신다. 나는 심마니분들이 주신 김밥을 함께 먹는다.

내가 여기에 산삼이 많아요? 라고 물으니, 한 분이 많다고 대답하신다. 소백산 자락에는 매년 비행기로 산삼 씨를 뿌려 이곳에서부터 소백산까지는 삼이 많이 나온단다. 자신은 매년 오 십 뿌리 이상 캔다고 자랑하신다.

우리는 작별을 하고 헤어지는데 헤어진지 몇 분도 안되어 "심봤다"는 외침이 들려온다. 삼을 발견하신 모양이다. 심봤다라는 음성에 왠지 내가 삼을 발견한 것처럼 기쁨에 싱글벙글하며 늦은목이를 향해간다. 늦은목이에서는 텐트치기에 적당한 장소가 있어서 텐트를 치고 좌측으로 내려가 물을 뜨러 간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의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종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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