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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는 중학교 수학여행에 꼭 끼어 있는 감초 같은 장소였다. 학생들에게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60줄을 넘기고 70줄로 접어드는 부모세대들의 누렇게 변한 사진첩에도 그 사진은 한두 장은 꼭 끼어 있다. 화전놀이나 마을동계 야유회를 갔던지 화사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몸과 어깨를 비스듬히 끼우고 한쪽 팔을 앞 사람 팔꿈치쯤에 얹고 찍은 칼라사진 말이다.

그때는 다리가 왜 그렇게 길고 넓었는지. 남해대교를 처음 접한 것이 중학교 수학여행이었다. 그리고 다시 남해대교를 찾았던 것이 지난 2002년이었다. 전국에서 새로운 정치를 꿈꾸던 사람들 틈에 끼어서 다리를 건넜다. 그때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함께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했었다.

다랭이에는 '아이들이 있다'

▲ 다랭이 마을의 보물, 아이들
ⓒ 김준
어느 마을이고 시골에는 아이들을 찾기 어렵다. 아이들은 고사하고 청년들을 찾기도 쉽지 않다. 하긴 적령기의 젊은이들이 있어야 아이들도 있을 텐데 모두 도시로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아이들이 있을 리가 없다.

젊은이가 있다고 해도 신부를 구하기 어려워 40대는 물론 50대 노총각으로 늙는 경우도 있다. 최근 '베트남처녀'를 소개하는 광고들이 도로변이나 시골 전봇대에 붙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지난 IMF 직후 섬에서 명예퇴직과 실직으로 내려와 양식을 하는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갯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복양식을 양식어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바다와 갯벌의 앞으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사람이 줄어드니까, 갯일 할 사람이 없으니까 막고 공장을 짓고 하는 것은 언 발에 오줌 싸듯, 발밑만 보는 것일 수 있다.

아침 일찍 다랭이 마을 갱번에서 해돋이를 보고 올라오는 길에 가방을 메고 올라가는 몇 명의 초등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50여 가구의 시골에서 초등학생을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다랭이 마을이라고 인구가 늘어날 리 없다. 한 때 120호까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 이들은 600여 개의 다랭이 논 23ha로 먹고 살았다. 지금은 이중 10ha는 묵히고 13ha만 농사를 짓고 있다. 금년에는 이중에서도 8ha만 농사를 지었다.

김주성 위원장은 다랭이의 최고의 보배는 '젖먹이 2명과 유치원생 5명'이라며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고 즐거워했다. 사실 다랭이마을 추진위원장인 김씨도 49세로 다른 마을에서는 젊은 청년에 속한다.

▲ 도시스럽게 꾸미지 않았지만 정겨운 맛이 난다(민박집으로 가는 길목).
ⓒ 김준
그린투어리즘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농림부, 해양수산부, 행정자치부 등은 앞 다투어 산촌, 어촌, 녹색농촌 등 체험마을과 정보화마을 등 갖가지 이름으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사실 5년 전 다랭이 마을에 남해 농업기술센터 직원이 찾아와 전통테마마을을 추진해보자고 했을 때, 김 위원장은 생각 없이 '지원금에 시멘트 좀 얻어다 마을에 필요한 사업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나 둘씩 사람들이 방문하자, 농업기술센터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과 방을 수리하고 체험거리도 마련했다. 하지만 어디 테마마을을 시작했다고 사람들이 기다렸다 몰려들던가. 2002년 첫해에 그만 둘까하는 회의도 많이 했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몇 명이 오든 체험을 해줘야 하는데 이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하루 일당에도 못 미치고, 생각처럼 돈이 되지 않자 주민들의 불만이 하나 둘 터지기 시작했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뚝심으로 밀어붙이던 김 위원장도 포기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도 손님들은 하나 둘씩 끊이질 않고 계속 오는 것을 오지 말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뭔가 될 것도 같은데 마을주민 모두가 이것만 바라보고 있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우선 가능한 사람끼리 하자 해서 11집의 의견을 모아 9집이 먼저 달라붙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기 시작하고 가능성이 보이면 다른 주민들을 그때 설득해 결합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다랭이 마을 대문 앞에는 농산물이 있다.
ⓒ 김준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이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손님을 맞는 것이 아니라 방송에 맞춰 촬영하고 인터뷰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생전 보기만 했지 직접 카메라 앞에서 서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30분짜리 촬영을 하는데, 이틀을 잡아먹고 그렇지 않아도 농사일에 민박 그리고 체험까지 맡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2004년에 방송만 50여 회를 했다고 하니까 그럴 만 했다. 한 번 하기 시작하니까 이제 요령도 생기고 지금은 10분짜리도 30분 촬영하면 끝난다고 한다. 그런 덕인지 2004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어떻게 해야 소득이 되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씩 안정되어 가고 있고 민박집도 15집으로 늘어났다.

▲ 밥짓는 굴뚝 연기도 쉽게 볼 수 있다.
ⓒ 김준
젊은 사람들 만날 수 있어 좋다

다랭이 마을은 설흘산에서 바로 내려오는 비탈길 옴팍한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 비가 아무리 많이 와서 수해를 입은 적이 없다. 그런데 몇 년 전 마을이 생긴 이래로 처음으로 하루 520mm라는 강우량을 기록했다. 장마피해를 모르던 마을이 수해를 입었다.

장수마을로 알려진 주민들도 생전에 이런 비는 처음 본다며 혀를 둘렀다. 그러니 도시로 나간 자식들이 어디 고향이 수해를 입었는지 어쩐지 알 턱이 없었다. 태풍이라도 되면 모르지만 아무리 비가 와도 끄떡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안부를 묻는 전화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 김주성 다랭이마을 위원장의 마을이야기를 듣고 있는 신안지역 주민들(신안문화원이 지역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 김준
그런데 동네 전화가 불났었다. 마을에 민박을 하고 간 아이들이 다랭이 할머니집 괜찮은지 전화를 하는 통에. 자식들보다 더 많은 전화가 왔다고 한다.

마을 노인들이 민박을 하면서 빠져드는 게 바로 이런 맛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인들에게 전화해주고, 찾아주고 말벗 해주는 것 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던가. 인적이 드문 '해변산중'의 시골집에 젊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는다는 것은 명절에 자식들이 아니고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 어느 작가가 며칠 동안 머무르며 주민들의 일상을 찍어 마을 '두레방'에 붙여 두었다.
ⓒ 김준
다랭이 마을 추진위원장이 서울에 다니러 갔다 느낀 생각이다. 지하철역에 봇물 터지듯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한참을 구경을 하며 서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결같이 얼굴이 노랗고, 모두 붕어빵처럼 생김새가 똑같았다.

공기는 메케하고 정은 메말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서울 거리에서 다랭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이럴 때일수록 농촌의 '정'이 도시사람들에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이지만 이곳에 묵어간 아이들, 특히 시골 할머니의 정, 고향의 정을 느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큰 감흥을 준다는 것이다. 마치 남해에 비가 많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이 전화를 하듯이.

다랭이에는 농산물 판매대도 없고 식당도 없다. 꾸밈이 없는 것이 통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 산골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사립문 옆에는 늙은 호박을 비롯해 수확한 농산물들이 쌓여 있다. 지나다가 쉽게 구입할 수도 있지만 그대로 훌륭한 마을 모습이다.

다랭이 마을은 손님에 제공하는 편안함은 육체적 안락함이 아니라 정신적 안정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을주민들을 먼저 챙긴다고 한다. 그래야 손님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을을 구경하고 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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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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