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울 도심 을지로 입구 사거리 옆 작은 녹지에서 자라는 감나무.대기 오염, 교통 소음 등 악조건 속에서도 갓난아기 주먹만한 감을 올망졸망 맺었다.
서울 도심 을지로 입구 사거리 옆 작은 녹지에서 자라는 감나무.대기 오염, 교통 소음 등 악조건 속에서도 갓난아기 주먹만한 감을 올망졸망 맺었다. ⓒ 이덕림
빌딩 숲에 둘러싸인 속에서 자라는 감나무. 앞의 감나무와 같은 나무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사진이다.
빌딩 숲에 둘러싸인 속에서 자라는 감나무. 앞의 감나무와 같은 나무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사진이다. ⓒ 이덕림
나목(裸木)이 된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이 첫눈을 머리에 이고 떨고 있다. 까치밥만 달랑 매단 나무가 대부분이지만, 주인의 여유로 아직도 농익은 결실을 그대로 달고 있는 나무도 꽤 있다.

맑고 싸늘한 대기 탓일까,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들의 빛깔이 한층 선명해 보인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초겨울 하늘이 배경이 되어 탐스런 주황색 과실들이 한 폭의 정물화로 다가온다. 까치보다 먼저 까치밥에 달려 들어 시식을 하던 참새들은 홍시 맛에 반해 떠날 줄을 모른다.

고만고만한 단독주택이 많은 서울 은평구 신사동과 이웃동네인 역촌, 구산동 등엔 감나무 한 두 그루 없는 집은 찾기 어렵다. 이쯤 되면 서울도 이제 감의 명산지로 이름을 올릴 만하지 않을까?

내한성(耐寒性)이 약해 중부 이남에서만 되던 감나무의 북방한계선이 북상하는 것을 보면 지구 온난화를 실감하게 돼 걱정이 따르지만 감이 있는 풍경이 도시의 분위기를 한결 정겹게 해준다는 점에선 단견(短見)이긴 하나 좋기도 하다. 특히 시골에 고향을 둔 이들에겐 감나무는 향수가 깃든 나무라 정감이 남다르다.

매화(梅花)와 함께 한·중·일 동양 3국에서만 자란다는 감나무. 시골집 뒤꼍의 감나무는 고향을 떠나온 이들의 기억상자 한 켠에 수줍게 피었다 떨어지는 노란 감꽃들의 추억과 함께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 있다.

감나무는 사람과의 정분이 남다른 나무이다. 고 이오덕(李五德) 선생에 따르면 벼가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 감은 사람의 숨소리, 사람의 말소리를 들어야 열린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지리산 기슭이 고향인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떠나 버린 빈집 감나무에는 그예 감이 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동네 골목의 감나무. 까치밥을 넉넉히 남겨 놓은 여유가 돋보인다. '참새밥'을 따로 챙겨준 것일지도...
우리 동네 골목의 감나무. 까치밥을 넉넉히 남겨 놓은 여유가 돋보인다. '참새밥'을 따로 챙겨준 것일지도... ⓒ 이덕림
나목이 된 감나무에 달려 있는 짙은 주황색 열매들. 주인의 여유로 아직 따지않은 감들이다.
나목이 된 감나무에 달려 있는 짙은 주황색 열매들. 주인의 여유로 아직 따지않은 감들이다.
겨울을 재촉하는 한줄기 한우(寒雨)가 흩뿌리고 지나간 며칠 전 아침, 타고 가던 시내버스가 을지로입구 네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멈춰 섰을 때 물방울이 번진 오른쪽 차창 너머로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 왔다. 한 잎 남김없이 잎사귀를 다 떠나 보낸 나무는 차가운 겨울비를 속절없이 맞은 채 로터리 옆 녹지 한 구석에 서있었다.

키에 비해 줄기와 가지가 가녀린, 수세(樹勢)가 좀 빈약하다 싶은 그 감나무에는 갓난아기 주먹만큼씩 한 감들이 올망졸망 달려 있었다. 어림짐작으로도 족히 60~70개는 될 그 열매들을 맺고 익히기까지 감나무는 도심의 소음과 탁한 공기 속에서 얼마나 산고(産苦)를 겪었을까를 생각하니 대견함과 미안함이 겹쳤다.

어릴 적, 할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 과수(果樹)에 꼭 예비(禮肥)를 주셨다. 과실을 맺느라 애쓴 나무들에게 감사의 예로 주는 비료이기에 '예비'라고 부른다고 일러주셨다. 나무 둘레를 널찍이 판 다음 두엄과 썩힌 계분을 함께 묻어 주시면서 겨우내 나무 뿌리가 따뜻해야 이듬 해 봄 건강한 새 싹을 내고 풍성한 결과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첫눈을 맞은 설렘마저 얼어 붙게 한 기습 한파가 이틀째 수은주를 끌어내린 날 아침, 일주일 만에 다시 을지로입구 사거리를 지나다가 차창 너머로 그 감나무를 찾았다. 명징한 동천(冬天) 아래 감나무는 떨고 서 있었다. 가지에 달린 열매들은 그새 쭈그러들어 있었다. 저 감나무에 예비는 주었을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