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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혼자 돌아 가다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것냐. 눈발이 그친 그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간절하다뿐이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르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다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 <눈길> 책표지
ⓒ 열림원
<눈길>(이청준/열림원/9800)에 나오는 어머니의 대사다. 이청준의 <눈길>과 더불어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린 이 소설집은 그 속에 어머니의 사랑이 정금같이 녹아있다. 특별히 이번 책은 만화가 변병준씨의 감성적이고 은은한 깊이가 느껴지는 그림이 작품의 영상미를 더해 준다. <눈길>은 작가의 실제 체험을 녹여 만든 것으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어머니의 깊고 깊은 사랑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눈길'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아들인 저자의 성장을 그려놓고 있다. 여름 하루 낮과 밤 동안 시골 고향집에 머물면서 일어나는 일과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회상소설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의 따뜻한 경제적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작가는 어머니와 서로 주고받을 진 빚이 없다는 마음을 가진 짐짓 이기적인 모습이며 두 사람 사이엔 벽이 느껴진다.

두 사람의 만남도 데면데면하다. 그런 가운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이야기하면서 남의 이야기 하듯 어머니가 풀어놓은 회상은 결국 작가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야 만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결국 외면할 수 없다. 가장 진자리에서 가장 높고 숭고한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그래서 소설 <눈길>은 저자의 말대로 어머니와 아내, 작가 세 사람이 함께 만든 것이다.

며느리가 자꾸 어머니의 입을 열어 말하도록 유도하고, 어머니는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이야기를 한다. <눈길>에서 어머니의 숭고하고 지극한 사랑을 보여준다. 집도 이미 남의 손으로 넘어가버리고 아들에게 따뜻하게 뒷받침해 줄 수도 없는 입장인데다 자기 한 몸도 이제 어디 기댈 곳 없는 신세가 된 어머니가 아들을 배웅 나와 함께 눈길을 걸었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아들의 작은 발자국마다 눈물을 뿌리며 아들 잘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마을 어귀에서 울어 시린 눈으로 비쳐드는 아침햇살이 부끄러워 동네로 들어가지도 모하고 갈 곳 없는 그 막막함.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여기 수록된 <사랑의 감대>는 어머니의 사랑은 신체 중에서도 가장 거칠고 사랑 받지 못하는 부분인 발바닥을 어루만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어머니는 발바닥이 누구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곳이기에, 가장 거칠고 보잘것없는 곳이라 어느 신체부위와 똑같이 사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어린 딸아이의 발바닥을 만지며 비로소 자기가 어렸을 적에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발을 잠들었을 때 만져보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다.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기시던 것도 비로소 이해할 것 같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닐는지 모른다. 참사랑은 오히려 그처럼 낮고 거칠고 딱딱한 발바닥 같은 데서부터라야 한다"고 저자는 소설을 빌어 말한다.

그런 곳이야말로 참된 사랑이 가장 잘 통하는 자리라고 적고 있다. 작가 이청준의 문학의 길로 들어선 이유 중 그 하나는 열 살도 되기 전, 어린 시절 수년 간에 잇달아 겪었던 아버지와 맏형, 그리고 아우의 죽음의 영향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온갖 간난신고를 겪었던 그의 삶과 어머니의 삶은 차가운 '눈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소설들은 어릴 적부터 몸 하나 누일 곳 없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오두막 하나조차 없어 비만 오면 비비 울어댄다던 비비새처럼 떠돌아야 했고, 고독했던 그의 삶의 고통으로 직조한 소설들이리라. 담담하게 풀어놓는 소설들은 그의 문학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이청준 문학의 주요테마 가운데 하나인 어머니를 절제된 미학으로 형상화한 이 소설집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작가 이청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시대적 어려움과 그의 고통스러운 삶의 굴레에서 건져낸 경험과 사유로 끌어낸 그만의 언어로 직조한 문학성이 뛰어난 많은 소설들을 낸 작가다.

영화로도 나왔던 <낮은 데로 임하소서>,한을 담은 <서편제>외 다수가 있다. 한국문단을 지키는 이런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차가운 겨울 날 '눈길'을 걷는 것 같았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어머니...라고 불러만 보아도 가슴이 뜨뜻해오는 이름...그런데 그 어머닌 차가운 눈길, 고단한 생 속에서 낮은 곳, 그 눈물의 자리에서 사랑을 베풀고 있다.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불효하는 난, 우린 어이할꼬.

"어머니가 걸었던 그 하얗던 눈길. 그 막막하고 서럽던 흰 길을 어찌 세상의 자식들이 다 알았다 할 수 있으랴. 자식은 끝내 다 이해하지 못할 그 어머니의 길...애초에 갚으려야 갚을 길이 없는 그 길, 어머니의 길, 눈길로 우리는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눈길

이청준 지음, 문학과지성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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