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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설산 길의 정상에서 만난 사람과 개. 해발 4300m에 가까운 이 높은 땅에서 사는 그의 삶은 어떤 것일까?
백마설산 길의 정상에서 만난 사람과 개. 해발 4300m에 가까운 이 높은 땅에서 사는 그의 삶은 어떤 것일까? ⓒ 최성수
허름한 옷에, 오랜 동안 씻지 않은 것 같은 저 얼굴에, 최소한의 것들로 살아가는 그 삶이 어쩌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은 아닐까?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은 것을 쓰며 사는 문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리라.

바람 속에서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한다. 잠시 머물렀던 버스가 다시 출발을 한다. 어쩌면 다시는 와 볼 것 같지 않은 해발 4300m의 백마설산을 내려간다. 그 산꼭대기에 풀포기처럼 깃들여 사는 사람들도 멀어진다.

더친, 숨어있는 마을을 지나 페이라이스(飛來寺)로 가다

정상을 넘어선 차는 아슬아슬한 굽이 길을 달려 내려간다. 올라올 때보다 더 오금이 저리고 아득하다. 내려다보면 천길 낭떠러지, 군데군데 위에서 떨어진 낙석도 있다.

"위에서 떨어져도 죽고, 아래로 떨어져도 죽는다."

일행 중 누가 그런 말을 한다. 가드 레일 하나 없는 길, 나무조차 제대로 자라지 않는 낭떠러지 아래는 바라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앞자리에 앉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차가 굽이돌 때, 바퀴는 길에 있지만, 내 몸은 낭떠러지 위에 있으니까요."

우리를 안내하던 병규씨가 질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한다. 정말 아득하고 아득해서 더 이상 생각의 가지가 닿을 수 없는 길이다.

한동안 내려가던 길의 아득한 아래쪽 골짜기에 마치 물이 고여 있는 것 같은 도시가 나타난다. 길쭉하게 골짜기에 숨어 있는 그 도시가 바로 더친이다. 강원도 태백의 철암쯤 되어 보이는 도시다. 이 깊은 산 속에, 특별한 농토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도시를 지나가는데, 수많은 트럭들이 길 가에 주차해 있어 길이 막힐 지경이다. 자세히 보니 모두 광물을 싣는 차다. 아, 이 도시는 탄광으로 수익을 올리는구나, 비로소 깨닫는다. 아무리 척박한 오지라도, 인간은 먹고 살 거리만 있으면 모여 마을을 이룬다는 것을.

더친은 아득한 산길을 비행기가 착륙하듯이 돌아 내려와야 닿는 곳이다. 또 더친을 지나 밍융삥촨이 있는 밍융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그 더친을 비행기 이륙하듯 뒤로 두고 산길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더친은 골짜기 사이에 숨어있는 도시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 도시가 그런 지형적 요건으로 인해 도리어 샹그리라보다 더 샹그리라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숨어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리라.

일몰의 비래사. 마음 절로 가라앉는다.
일몰의 비래사. 마음 절로 가라앉는다. ⓒ 최성수
더친을 이륙(?)한 버스가 한참을 더 달려 도착한 곳은 페이라이스(飛來寺). 근처의 산장에 짐을 풀고, 페이라이스 구경을 나선다. 길을 따라 조금 거슬러 오르자, 오른쪽으로 낡은 절이 하나 덩그마니 놓여 있다. 이 절이 비래사다.

이미 저물녘이라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는데, 조그만 절에는 인적도 없다. 역시 낡고 바랜 절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채 10분이 넘지 않는다. 페이라이스는 절의 모습보다는 그 절에서 바라보는 설산의 일몰로 이름난 곳이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고, 어둠은 조금씩 세상으로 내려앉는데, 페이라이스에서 바라보는 설산에는 땅거미와 노을이 뒤섞여 붉기도 하고 검기도 하다. 세상의 끝에 온 느낌이 든다. 마치 형제처럼 봉우리를 삐쭉삐쭉 내밀고 있는 설산 위로 점점 어둠이 내리고, 산봉우리에는 어둠이 짙을수록 더 빛을 발하는 선지자의 지혜처럼, 눈이 쌓여 있다.

마치 우리 나라 민박집 같은 숙소에서 나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 한밤중, 밖으로 나와 어둠에 싸인 설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도 설산은 의연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온 몸이 으슬으슬해 지도록 추운 여름이었지만, 그러나 설산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냉기는 이겨낼 만 한 풍경이었다.

설산, 나는 설산을 보기 위해 소혹성 B612호의 어린 왕자처럼, 찬 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
설산, 나는 설산을 보기 위해 소혹성 B612호의 어린 왕자처럼, 찬 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 ⓒ 최성수
선잠에서 깨어난 새벽, 사람들은 일출을 구경하기 위해 숙소 밖에 나와 설산과 마주한다. 나는 소혹성 B612호에 있던 어린 왕자처럼, 숙소의 낮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조금씩 옮겨가며 일출을 기다렸다. 일출의 햇빛이 설산을 붉게 물들인다는 그 장관의 풍경은, 그러나 날씨가 흐려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밍융삥촨, 한 여름의 빙하를 보다

다음 날 일찍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또 아슬아슬한 굽이 길을 지나 밍융마을로 간다. 빙하를 보기 위해서다. 밍융삥촨은 메이리쉐산에 있는 빙하다. 메이리쉐산은 해발 6740m, 산 위는 늘 눈에 덮여 있다. 아직 한번도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신성한 산이란다.

또 다시 꼬불꼬불하고 험한 길을 달린다. 역시 가는 길은 오금이 저리지만, 풍경만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한참 내리막길을 지나자 거센 물살이 나타난다. 란창지앙(瀾滄江)이다.

란찬지앙은 티베트에서 시작해 이곳을 지나고, 미얀마, 라오스, 타이, 베트남을 거치는 총 길이 4020Km의 동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중국에서는 란찬지앙이지만, 동남아에서는 메콩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물이 흐르고 흘러 동남아의 여러 나라를 거치고, 마침내는 남중국해의 바다에 닿을 날은 그 언제일까? 문득 물살을 따라 그 나라들로 흘러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때문이리라.

밍융삥촨 가는 길목의 란찬강. 저 물줄기가 흘러 메콩강을 이룬다.
밍융삥촨 가는 길목의 란찬강. 저 물줄기가 흘러 메콩강을 이룬다. ⓒ 최성수
물살을 한동안 거슬러 오르자 밍융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에서 버스를 내리고, 말로 갈아탄다. 말은 험한 산길을 잘도 걸어, 두어 시간 만에 빙하 가까이에 우리를 내려 놓는다. 나무 계단을 조금 걸어 오르자, 눈앞에 커다란 빙하가 나타난다. 빙하라기보다는 빙벽이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빙벽의 모양이 꼭 우리 나라 지도를 닮았다. 군데군데 시리도록 푸른 얼음 덩어리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큰 얼음이 얼어 있는 모양이다.

밍융삥촨보다 더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그 빙하 마을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포도 덩굴도 보이고, 목책을 쳐 놓고 작물을 기르는 풍경도 한가롭다. 시간이 된다면 그 집 어느 한군데에 들어가 며칠이고 묵고 싶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그들의 삶이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 척박한 자연 속에서 결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칭화대 왕후이 교수의 글에서 만났던 마화와 같은(이어진 이전 기사 <샹그리라 가는 길, 후타오샤 댐이 가로막고> 참조)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까 말이다.

나는 샹그리라를 거쳐 쿤밍으로, 쿤밍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밍융마을 가는 길의 그 아득한 풍경과 가슴 탁 막히게 하는 산, 황토색으로 흐르는 란찬지앙의 물살을 떠올렸다. 동시대의 삶이지만, 내가 보고 만난 사람, 풍경들과 나는 서로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우리는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여행길에서 돌아온 지금도 나는 가끔 밍융마을의 설산과 아득한 길을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히말라야의 수천 길 낭떠러지 같은 것은 아닐까? 일상에 지치고 마음 기댈 데조차 없는 날에, 샹그리라와 더친의 그 밍융마을과 설산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아, 생은 늘 그리움으로 더 빛나는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운남 2차 여행의 마지막 여행기입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여행기는 쿤밍에 사는 한국인 윤병규씨의 도움에 크게 기대고 있습니다. 운남에 관한 자료는 그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shanglila2004.cafe에서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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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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