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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산 단풍! 왜 금수산이라고 했는가 알만 하였다
금수산 단풍! 왜 금수산이라고 했는가 알만 하였다 ⓒ 김형태
호반을 끼고 가던 일행은 우리가 묵을 숙소가 보이자, 터져 나오는 탄성을 감출 수가 없었다. 숲속 여기저기에 앙증맞게 자리잡은 집들이 동화 속 세상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능강콘도(CLUB ES)는 청풍호가 보이는 산등성이 작은 마을에 옹기종기 지은, 문화와 예술이 숨쉬는 테마 콘도였다. 아파트형 단일 건물이 아니라 알프스 샬레풍의 단층, 혹은 복층 건물이었다.

호숫가 언덕 위에 작은 집도 있었고, 중세 유럽풍의 고색창연함을 물들여 놓은 듯한 집도 보였다. 때로는 소박하고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다 가고, 때로는 성주처럼 귀족적인 분위기에 한껏 취해 보라는 주인장의 뜻이란다. 우리는 전망이 가장 좋다는 꼭대기 집에 여장을 풀었다.

간단히 씻고 난 후, 우리는 산책에 나섰다. 먼저 '도예방'이 눈에 띄었다. 온가족이 동심으로 돌아가 함께 즐기는, 자유로운 흙놀이 공간이란다. 찰흙과 공작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야외 '아틀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장소 어디서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보란다. 화구는 카페 비노로소에서 대여해 주고 있었다. 방목장에는 토끼와 오리, 닭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고, 사육장에는 사슴과 염소들이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산과 계곡의 품안에서 편안히 쉬다 가라는 '명상의 집'이 보였고, 산책로, 전망대 등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즐기라고 매주말 다양한 문화와 예술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매주 토요일 저녁 7시에는 '야외 뮤직 라이브'가 열린다. 바비큐 뷔페를 앞에 놓고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흥겨운 주말밤을 선사한단다.

산림욕을 할 수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시(詩)가 소박한 모습으로 반긴다.
산림욕을 할 수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시(詩)가 소박한 모습으로 반긴다. ⓒ 김형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1시간 가량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얼마나 맛있는지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소화도 시킬 겸 다시 산책에 나섰다. 별빛이 총총한 호반의 야경은 또 다른 구경거리였다. 나무로 만든 작은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자 세상이 별천지처럼 달리 보였다. 가로등 가까이 가보니 나방들이 불빛에 달려들고 있었다. 가다가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어 우리도 끼어 노래도 하고 이야기꽃도 피웠다.

청풍호반에서 보는 낙조
청풍호반에서 보는 낙조 ⓒ 김형태
사람들을 따라 영화를 볼까 하다가, 누가 가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일행은 자연스럽게 호수를 볼 수 있는 전망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수에는 달이 뜨지 않았다. 잔뜩 기대했던 박형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최형이 조금만 기다리면 달이 뜰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티타임을 갖고 있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 하늘과 호수 속에 달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떨기 연꽃이었다. 송강 정철이 왜 달을 보고 백련화(白蓮花)라 했는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풍명월은 차라리 한 떨기 연꽃이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풍명월은 차라리 한 떨기 연꽃이었다. ⓒ 김형태
다음날, 우리는 참치찌개로 아침 식사를 하고, 비교적 이른 시간에 금수산 등반에 나섰다. 듣자 하니, 이곳 제천은 허영호, 최종렬 등 세계적인 산악인을 배출한 산악의 고장이란다.

그 이름 금수산

금수산은 제천시 수산면과 단양군 적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해발1016m의 명산이다. 월악산 국립공원 최북단에 위치하여 산 이름이 그러하듯 가을이면 비단에 수를 놓은 듯 고운 단풍과 산세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용담폭포(30m), 선녀탕, 한여름 삼복더위에 얼음을 볼 수 있는 한양지(얼음골)에서 발원하여 능강리를 거쳐 청풍호로 흘러드는 능강계곡의 절경 9곳, 그리고 망덕봉, 신선봉, 미인봉, 동산, 까치성산 등은 기암과 절경으로 등산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매년 금수산 전국산악마라톤대회가 개최되어 전국에서 많은 산악인들이 찾는다.

금수산을 바짝 끼고 청풍호반의 푸른 물이 감싸고 돌기 때문에 주변경관 또한 일품이다. 정말 청풍호반을 발 아래 굽어보는 금수산 산행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 속에 빠져든 것을 연상케 할 만큼 산행이 묘미를 더해 준다.

용담폭포와 선녀탕, 얼음골 등 갖가지 기경이 많아 산행의 진수를 맛보게 하며, 울울창창한 노송이 있어 장관을 더한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그림 같은 파노라마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백운산’이었다. 조선조 중엽 단양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 선생께서 너무도 아름다운 가을경치에 감탄하여 ‘금수산’으로 개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금수산 정상부의 원경은 길게 누운 임산부의 모습인가 하면 사자머리 형상 같기도 하고 남쪽 능선에서는 뽀족봉으로 보이는 등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인다. 봄의 철쭉과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 등으로 계절에 따라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산행을 하는 데는 두 코스가 있었는데, 우리는 제2코스를 통해 정방사까지 다녀왔다. 가는 길에 구절초, 벌개미취, 달맞이꽃 등 여러가지 야생화와 척박한 오솔길에 뿌리를 박고 피어 있는 키작은 코스모스들이 인상적이었다.

쑥부쟁이와 달맞이꽃.
쑥부쟁이와 달맞이꽃. ⓒ 김형태

산행길에서 만난 가을 벗, 갈꽃
산행길에서 만난 가을 벗, 갈꽃 ⓒ 김형태
또한 차고 맑은 계곡수가 흐르는 물길 곳곳에는 천하절경(쌍벽담, 몽유담, 와룡도, 관주폭, 춘주폭, 금병담, 연자탑, 탈당암, 취적대)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능강구곡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능강계곡물은 정말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쉬리는 물론 일급수에서만 산다는 버들치, 열목어까지도 보였다.

점심식사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여자들이 아침을 준비했기에 점심식사는 남자들이 마련했다. 어설픈 음식 솜씨 때문인지, 아침의 참치찌개보다 맛은 덜했지만, 그래도 다들 맛있게 잘 먹었다. 왜 야외로 나오면 식욕이 돋는 걸까?

점심을 먹은 일행은 체크 아웃을 하고 숙소에서 나와,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전설이 서려 있다는, 또한 대중가요 <울고넘는 박달재>의 소재가 되었다는 바로 그 박달재로 향했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틋한 전설의 고개에서 '울고넘는 박달재'를 읊조리듯 불러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위의 나무들도 그런지 모두들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박달재 전설

옛날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금봉은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인 모양이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이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단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詩)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 이슬을 맺는데 /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 김형태

애절한 사연에 자연도 빨갛게 물들고...
애절한 사연에 자연도 빨갛게 물들고... ⓒ 김형태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겼다.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로 숨어 들어 살았는데, 그들은 옹기장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 김형태
이곳은 황사영이 토굴속에 숨어 당시의 박해 상황과 천주교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집필한 곳으로, 1855~1866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신학교가 소재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하고 있으며 1866년 병인박해의 첫 순교자인 남종삼이 출생한 지역이란다. 1958년 원주교구장이 진입로를 새롭게 하는 등 성지 일원을 말끔히 정리하고 단장했다.

제천 10경의 하나인 탁사정은 강원도 원주에서 제천을 들어오는 국도 5호선변에 자리하고 있는 제천근교의 유일한 유원지이며 여름 피서철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이다.

조선 선조 19년(1568)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고향에 돌아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심고 이곳을 팔송이라 명명했고, 그뒤 그의 아들 희운이 정자를 짓고 팔송정이라 했단다. 이후 허물어진 팔송정을 후손 윤근이 다시 세웠고 원규상이 탁사정이라 했다.

ⓒ 김형태
그러나 안타깝게도 팔송은 모두 죽고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의 해송은 1999년도 10월 팔송마을과 제방둑에 심은 것이다. 그리고 제천 10경의 탁사정은 정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 주위의 절경을 말한다. 탁사정에 오르니, 선인들의 풍류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탁사정을 끝으로, 오후 4시쯤 서울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 호반길을 좀 더 드라이브했다. 그런데 차를 따라 몸은 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풍에 묶여 있었다. 아마도 앞으로 달이 뜨는 밤이면 이곳 청풍호반이 두고두고 생각날 듯싶다.

우리는 이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서울로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신갈쯤 왔을 때, 서쪽 하늘의 낙조가 장관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보는 낙조도 꽤 볼 만했다. 우리는 낙조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신갈~안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모두들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저 지는 태양을 어젯밤에 보았던 청풍명월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지는 해가 마치 청풍에서 본 핏빛 담쟁이 같았다.
지는 해가 마치 청풍에서 본 핏빛 담쟁이 같았다. ⓒ 김형태


 

덧붙이는 글 | 청풍명월 여행 기사 공모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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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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