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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을 지나는 길에는 억새 무더기가 새하얀 그리움을 실어 나르는 중이다. 깊어가는 가을도 잊어버린 듯하다. 이 녀석은 언제나 들 뜬 마음을 바로 잡아 주는 능력이 있다.
한 계절을 지배하고 있는 억새가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면 손해가 클 뻔 했다. 제주 4.3평화공원 옆에서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아스라한 추억을 만났다. 양지바른 언덕에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억새와 어울리고 있었다. 보리수나무를 제주에서는 '볼래낭'이라 부른다.
어린 시절, 들에 나가면 늘 반겨주던 볼래낭 열매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반갑다. 시골 생활에 대한 향수가 볼래낭에 맺혀 있어서일까. 들과 산으로 쏘다니며 잘 읽은 열매를 찾아 헤매던 기억이 새롭다. 산열매를 따다가 누이에게 나눠 주던 추억이 묻어 있기도 하다.
그 맛도 달콤하고 새콤하다. 떫은 맛도 적다. 설령 입맛이 바뀐들 고향의 맛이 어디 가랴. 함께 뛰놀던 동무들의 정다운 얼굴들이 볼래낭에 걸리고, 뿔뿔이 흩어진 고향식구들의 온정이 이 작은 열매에 머무는 것을 어찌하랴.
보리수나무에는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많다. 슈베르트의 가곡에 등장하는 성문 앞 샘물 곁에 서있는 보리수, 아니면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서 도를 깨우쳤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토종 보리수나무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가곡의 린덴바움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불교의 보리수와 혼동하여 잘못 옮긴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원래 우리나라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수나무가 자랄 수 없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인도 보리수가 우리나라에서는 추워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교신자들이 대용 나무가 필요하여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피나무(달피나무)나 보리자나무를 '보리수'란 이름을 붙여 널리 심었다고도 한다.
보리수나무를 부르는 이름도 많다. 지방에 따라서 보리똥나무, 뻐루똥나무, 보리화주나무, 볼레나무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호퇴목(虎頹木)이라고 하고 그 열매를 호퇴자(胡頹子)라고 한다. 이름 그대로 호랑이를 물리치는 나무라는 뜻이다. 잔가지와 열매에 호랑이 무늬와 닮은 얼룩점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 같다.
비슷한 나무로 보리장나무, 보리밥나무, 뜰보리수(왕보리수)나무가 있다. 가을에 열매가 작고 둥그스레하게 열리는 나무가 진짜 보리수나무다. 봄에 열매가 크고 타원형으로 열리는 나무는 보리장나무 또는 보리밥나무이며, 제주에서는 이를 보리볼래낭이라 부른다.
동물이나 식물의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우리 이름을 붙여 자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쏟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볼래낭에 쏟아지는 햇살만큼 추억의 나무에 그리움이 뭉클하다.
덧붙이는 글 | 김동식 기자는 제주 서귀포시청에 근무하고 있으며 서귀포감귤박물관에서 마케팅팀장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