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이 참 높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는 그만큼 깊은 법이다. 송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보니 저 멀리 '영봉'이 보인다. 어찌나 산세가 멋지고 기암괴석이 우뚝 서 있는지 마치 신령을 대하는 듯 했다. 이름 뜻 그대로인 '영험한 산봉우리'가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영봉 아랫자락에 산지기를 하고 있는 스님에게 한 마디 건넸다. 영봉에 얽힌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그랬더니 스님은 그 옛날 신선들이 저 위 영봉에서 몇 날이고 놀다 갔다고 이야기 해 준다. 더욱이 저 꼭대기에 올라가 소원을 빌면 모든 일들도 술술 풀린다고 곁들여 준다.
하지만 그 봉우리까지 올라갈 힘이 없다. 세 살 배기 딸아이에다 육 개월 된 아들 녀석까지 있으니 그 산이 내게는 너무 멀기만 하다. 더욱이 집사람도 힘들다는 눈치를 자꾸자꾸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영봉에 올라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 영봉을 뒷전으로 하고 또 무럭무럭 올라갔다. 그랬더니 '월악루'가 나왔다. 지금은 성루와 성벽을 새로 쌓았지만 그렇다고 옛 자취와 흔적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견뎌 낸 듯한 거무스름한 성벽이 산기슭을 따라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성루 앞에는 옛 사연을 담은 푯말 하나가 서 있었다. 그 푯말엔 고려 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역사와 함께 그 규모가 어떠한지 알려 주고 있었다. 물론 허름한 옛 성벽과 단단한 새 성벽을 그대로 이은 것은 최근 일임을 밝혀 놓고 있었다.
"고려 고종 때 몽고 침입 시 월악대왕의 가호와 월악신사 등과 관련한 항몽의 유적지이다.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축성하고, 임진왜란 때에도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명성황후와 관련이 있는 등 역사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대표적인 사적이다."
월악루에 이어 닷돈재를 향해 올라갔다. 그 닷돈재 오름길에서 맛깔스런 음식점을 하고 있는 주인장을 만날 수 있었다. 늙은 할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많은 세월 동안 이 곳에서 함께 한 듯 싶은 아저씨였다. 도무지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한 성미라 나는 무턱대고 주인어른에게 물어 봤다.
"아저씨. 왜 이곳을 닷돈재라 부르나요?"
"그거요. 이 길을 넘을 때 닷돈을 받았다고 해서요."
"아, 그래요.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네요. 고맙습니다."
"그럼 좋은 여행길 되세요."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니까 옛날 이 길을 넘어가려면 사람들이 닷돈을 냈던 것뿐이다. 그럼 누가 그 닷 냥을 챙겼을까? 산적이나 도적 떼였을까? 아니면 관가에서 나온 포졸들이었을까? 산적이든지 관가 사람이든지, 그 닷돈은 그 당시 통행세였을 것이다.
왜 그들은 통행세를 걷었을까? 그건 다른 데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이 고개 길을 넘어가야 '미륵리사지'로 갈 수 있고, 또 '하늘재'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 두 곳은 닷 냥을 받아내기에는 결코 부족하지 않는 곳이란 뜻일 것이다.
하여 숨 가쁘게 미륵리사지로 올라갔다. 미륵리사지에 얽힌 이야기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이 곳에 석굴사원을 만들도록 했다. 그 후 고려는 삼국을 통일한 후에 이 절의 방향을 북쪽으로 틀도록 했다. 그것은 삼국을 통일한 후, 잃어버린 옛 고구려 땅을 다시금 되찾고 싶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리고 미륵리사지는 종교적인 역할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 옛날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를 잇는 군사 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 좀 전에 만난 닷돈재에서, 닷 냥 씩이나 되는 통행세를 걷었다는 것은 그저 빈말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 미륵리사지 옆쪽으로는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이 놓여 있었다. 지금은 고갯길이 도로를 만들기에는 귀찮은 장애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에게는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기에 그 어떤 곳보다 더 좋은 길이었다.
이곳 하늘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옛날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사람들과 충주 상모면 미륵리 사람들 사이를 이어 준 귀한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 하늘재는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될 정도로 정말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헌데 이 하늘재로 가는 길목에는 '자연관찰로'까지 놓여 있었다. 이를테면 하늘재를 올라가는 길목에 식물과 숲이 어떻게 이뤄지고 또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로움을 주는지를 가르쳐 주는 푯말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걸음걸이를 뗐다면, 어른과 함께 한 발 두 발 걸어가기에 이보다 더 좋은 산책로도 없을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