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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 표지.
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 표지.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의 역작 <25시>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 평범하고 순박한 루마니아 농부인 모리츠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징발당하여 유대인 캠프에 수용된다. 그는 탈출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로는 유대인으로, 때로는 루마니아 인으로, 때로는 독일인으로 둔갑돼 13년 동안 100여 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한다. 그리고는 어느 날, 체포되던 때와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른 채 석방된다.

파란만장한 모리츠의 비극은 그가 한번도 '개인 요한 모리츠'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자리가 옮겨질 때마다 단지 '적성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게오르규는 한 인간을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된 사회 구성체의 '종속물' 정도로만 여기는 인간부재의 상황을 절망의 시간인 '25시'로 규정하고 이를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런데 요한 모리츠는 게오르규의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올해 미국 관타나모 교도소에서 석방된 아프가니스탄의 한 작가형제가 그 같은 예다. <에이피> 통신은 최근 해외 미군 감옥 수감자 및 출소자들의 인터뷰를 소개했는데 이들 형제가 그 중 하나다.

소설 <25시>의 요한 모리츠와 현실세계

바드르와 도스트는 부패한 정치가를 야유하고 서민들의 고난을 드러내는 풍자적인 글을 쓰는 아프가니스탄의 소설가 형제다. 바드르는 <캔터베리 이야기>나 <걸리버 여행기> 등과 같은 정치 풍자적 글쓰기를 좋아하고, 도스트는 앞에서는 '성전(Jihad)'을 선동하고 조직하면서 뒤로는 부를 축적하는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 지도자의 이중생활을 풍자시로 엮어냈다.

그러던 2002년, 이 형제는 몇 년 전에 작성한 글 때문에 '악질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테러범을 수감하는 미군 운영 관타나모 교도소로 보내졌다.

두 형제 작가의 억울한 옥살이를 보도한 <에이피> 통신 10월 31일자. 사진 오른쪽이 형 바드르, 왼쪽이 동생 도스트.
두 형제 작가의 억울한 옥살이를 보도한 <에이피> 통신 10월 31일자. 사진 오른쪽이 형 바드르, 왼쪽이 동생 도스트.
1998년 클린턴 행정부가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해 5백만 US달러를 제공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을 체포하는 사람에게 5백만 아프간달러(113 US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 그들의 풍자글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글은 단지 탈레반 정권하의 어려운 아프간 경제와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 스캔들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중풍자일 뿐이었다.

이들은 그 곳에서 수개월간 취조를 당했다. 조사관들은 계속해서 묻고 또 물었고, 형제는 그때마다 자신들의 글이 단지 풍자였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설명해야 했다. 결국 이들이 클린턴이나 미국에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시키고 풀려나기까지 3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억울한 옥살이...150회에 걸친 취조와 모욕

그나마 바드르와 도스트 형제는 관타나모 감옥의 500명 이상이나 되는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둘 다 대학교육을 받았고 바드르가 영문학 석사학위를 갖고 있어 조사관들과 영어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작가였기 때문에 그들의 대부분의 행적과 정치사상은 책이나 논문에 공개되어 있었다.

두 형제가 3년간 고초를 겪은 관타나모의 캠프 델타 수용소. 로이터 통신 11월 7일자.
두 형제가 3년간 고초를 겪은 관타나모의 캠프 델타 수용소. 로이터 통신 11월 7일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형제는 구금 35개월 동안 서로 다른 기관에서 파견된 25명의 조사관들로부터 150회에 걸친 취조를 받았다. 한 취조팀이 "그들의 작품이 단지 풍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다른 기관에서 나온 취조팀과 처음부터 다시 그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들은 고문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동할 때마다 머리에 두건이 씌워지고 발에 쇠줄이 채워진 채 짐짝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거나, 다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발가벗겨진 채 사진이 찍히거나 정기적인 직장(rectal)검사를 받기도 하는 등 고의적인 모욕을 당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드르는 "CIA, FBI, 국방부 등을 포함한 네 군데의 기관이 모두 그들의 석방에 동의하기 전까지는 풀려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내가 단순한 사실만 이야기해도 그것이 확인되는데 두 달 내지는 두 달 반이 걸렸으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네 말이 사실이었다'는 소릴 듣곤 했다"고 말했다.

아프간 주둔 미군 측 책임변호사인 새뮤얼 롭 대령은 이에 대해 지난달 31일 <에이피> 통신에 "해외의 미 국방부 교도소는 9.11 테러공격과 같은 사건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일반 법률시스템과 동등하게 다뤄질 수 없으며 무고한 희생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면서 "석방 절차가 늦는 것은 한 명의 진짜 테러리스트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방부 대변인 플렉스 플렉시코 해군소령은 이 형제들의 구금에 "전혀 잘못이 없었다"면서 이들의 행위가 국방부에 의해 전투나 전투지원으로 간주되는 행위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형제작가, 수감된 진짜 이유 따로 있었다

<워싱턴 포트스>의 관련 기사. 켐프 델타를 경비하고 있는 경비원.
<워싱턴 포트스>의 관련 기사. 켐프 델타를 경비하고 있는 경비원.
하지만 이들 형제는 직접 전투에 참여한 적도 없고 미군들이 자신들을 묘사하는 것처럼 '적군'으로서의 활동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미 국방부는 이들을 왜 수감했던 것일까.

<에이피 통신>이 최근 이들 형제와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바드르와 도스트 형제는 탈레반 정권을 이루었던 종족 중 하나였던 파슈툰 족이다. 그러나 평소 그들의 가족도서관은 탈레반 정권에 의해 금지됐던 금서들로 가득 차 있었고, 수년간 그 도서관은 파슈튠 지식인들과 정치활동가들을 위한 만남의 자리로 제공됐다. 이른바 형제는 반 탈레반 진영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1980년대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했을 때, 수많은 아프간 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파키스탄으로 망명해서 반 소련 운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1989년 소련이 철수한 후 형제는 이 조직과 결별했다. 이 조직의 지도자였던 사미 울라흐가 아프간의 국익을 저버리고 파키스탄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작가 형제는 울라흐에 대한 풍자글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2001년 미군이 아프간을 침공했을 때 사미 울라흐로부터 "정당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는 협박을 받게 됐다. 그로부터 10일 후 형제는 교도소로 보내졌다. 결국 반 탈레반파인 이들 형제는 미군 점령하의 아프간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하루아침에 '미국의 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들은 2002년 2월 아프간의 미 공군기지 감옥으로 후송되고 나서야 울라후와 밀착관계에 있던 파키스탄 정보국에 의해 자신들이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지지자들로 미군 당국에 거짓 고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3개월 후인 5월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로 옮겨졌다.

미 국방부 "관타나모엔 학대행위가 없다"

바드르 형제의 증언은 그렇잖아도 관타나모 수감자들에 대한 학대 의혹에 시달려 오던 부시 행정부를 난처한 지경에 몰아넣고 있다. 이들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게 확인되면서 이들 외에도 또 다른 무고한 이슬람인들이 미군교도소에 수감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커졌기 때문이다. 바드르 형제 외에 <에이피> 통신이 인터뷰한 다른 아프간 인들과 전 미군 수사관들도 미국이 탈레반과 알카에다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무고한 아프가니스탄인 다수를 구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쿠바 관타나모만(灣)에 있는 미국 해군기지 캠프 델타에서 한 수감자가 2명의 미군 간수에게 끌려가고 있다.
쿠바 관타나모만(灣)에 있는 미국 해군기지 캠프 델타에서 한 수감자가 2명의 미군 간수에게 끌려가고 있다. ⓒ AP=연합뉴스
형제 작가는 "관타나모의 많은 조사관들이 저질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들이 증언한 한 노인 수감자의 이야기다. 한번은 한 노인이 헬리콥터에 총질을 해댔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통역관에 매를 잡기 위해 덫을 놓았는데 매가 달아나 버려 홧김에 매에게 총을 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역관은 페르시아어인 'booz'(매)와 'baz'(염소)를 혼동해 "어떻게 염소를 쏘기 위해 하늘로 총을 쏘느냐"며 오히려 노인이 조사관들을 희롱하고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아프간의 바그람 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칸다하르에서는 더운 날씨에 수감자들이 머리와 손을 바닥에 대고 꿇어앉아서 서너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 의식을 잃기도 했다고 말했다.

<에이피> 통신이 보도한 다른 석방자들의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최근 아프간의 미군교도소에서 석방된 12명의 수감자들 중 8명의 수감자들이 직접 매를 맞거나 아니면 다른 수감자들이 맞는 걸 보거나 들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미 정부는 관타나모의 학대행위에 대해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 미군은 작년 미 의회와 유엔 및 국제 인권 단체들이 아프간과 관타나모 교도소의 학대행위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에 밀려 조사를 시작했으나 보고서의 공개를 거부해 왔다.

지난 1일에는 관타나모 수감자들이 학대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음식을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명의 유엔 조사관들이 직접 면담조사를 요구하고 나섰으나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럼스펠드는 조사결과를 비밀에 부치는 국제적십자사에게만 인터뷰를 허용하던 종래의 정책을 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지난 8일 AFP 통신에 "아브 그라이브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탄식했다. 그는 "미국 관리들은 이라크와 아프간 및 관타나모 등에서 수감자들을 학대해 왔으며, CIA가 동유럽에 비밀 감옥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면서 "딕 체니 부통령은 오만하고 뻔뻔하게도 고문이 미국의 항구적인 정책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비판했다.

"상식적인 미국인들을 만나고 싶다"

바드르는 석방 뒤 "미국인은 그들의 정부를 비판할 자유가 있고 이러한 자유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면서 "우리는 용의자가 유죄임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미국 법에 대해 알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 법이 거꾸로 적용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미군들의 학대행위에 대해서는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모든 미국인들을 증오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형제는 9.11테러 이후 아랍인들에 대해 집단적 적대감을 보이고 있는 미국인들이 아니라, 한 인간을 개체로서 바라보고 인격권을 존중해 주는 상식적인 미국인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이 관타나모에서 경험한 인간부재의 '25시'가 평범한 미국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관타나모 수감자는 항소권도 없다?
미 상원, 항소권 박탈 '그래햄 법안' 통과...마찰 예상

관타나모 수감자들의 학대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으나 지난해 봄 이라크 아브 그라이브 감옥 수감자 학대사건이 국제적인 관심거리로 떠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미 의회에서는 그동안 관타나모 수감자들의 인권문제가 논란거리가 되어 왔고, 최근 들어서는 이들의 항소권 부여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다.

2004년 6월 28일 미 연방 대법원은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는 미 국내법상 치외법권적 테두리에 있지 않으며 수감자들은 구속에 대해 항소할 권한이 있다는 변호사들의 주장을 6대 3으로 받아들이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지난 10일 미 연방 상원은 이 항소권을 박탈하는 '그래햄 법안'을 49대 42로 가결했다. 린드세이 그래햄 공화당 의원(사우스 캐롤라이나)이 제안한 이 법안은 관타나모 수감자들은 구금당시 미 정부가 국방부의 구금 절차 규정을 따랐는지에 대해서만 질문할 수 있으며 구금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만약 그래햄 법안이 하원에서도 통과된다면, 현재 관타나모 감옥에 있는 500여명의 수감자들 중 200여명이 미 연방 법원에 제기한 항소는 몽땅 무효화 된다.

그램햄 법안은 지난 10월 6일 존 맥케인 공화당 의원이 제안한 학대금지 법안이 90대 9로 통과된 지 불과 1개월여 만에 이루어졌다. 딕 체니 부통령은 그동안 맥케인 의원을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에게 장래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 해외의 테러 혐의자들에 대한 특별 수사권을 CIA에게 부여토록 해 달라고 호소해 왔다.

그래햄 의원은 이번 법안을 제안한 배경에 대해 '사법부가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조사를 법적으로 제재하는 권한을 제한하고 연방조사관들이 구금자들로부터 정보를 캐내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하원 통과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반대자들은 테러 연루 혐의로 구금된 사람들에 대한 학대 보고가 국내외적으로 빗발치고 있는 마당에 이 법안의 통과는 여론을 거스르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제프 빙햄 민주당 의원(뉴멕시코)은 10일 <뉴욕타임스>에 "지금은 이 나라가 설립된 원칙들로부터 퇴보해야 할 시대가 아니다"면서 오는 21일 새 법안을 상정하겠다고 밝혔다.

또 연방대법원과의 마찰도 예상된다. 연방 대법원은 지난 8일 앞으로 관타나모 수감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헌법규정의 적용을 고려할 것이라고 공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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