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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중에서 가장 즐겨찾는 들국화 감국을 보면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싶어진다.
꽃 중에서 가장 즐겨찾는 들국화 감국을 보면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싶어진다. ⓒ 김규환
한창 장가를 못가서 안달이었던 때가 있었다. 20세기 말 어느 해에 33살이었으니 노총각 중 상 노총각 아닌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동네 헌집을 빌려 '향가 가득한 집-쳥산'이라 짓고 2년을 살다가 '아차 이러다가 평생 혼인 한번 못하고 총각귀신이 되겠구나!' 하는 위기감에 해마다 100만원씩 주던 세를 며칠 내지 않고 고민에 빠졌다.

사실 이름만 그럴싸하지 이리 보면 산막이요, 저리 보면 '귀곡산장' 같은 분위기였다. 게다가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친 지는 몇 달 되지 않았다. 그래도 빈집을 고쳐 제법 쏠쏠한 수익을 올렸던 건 내 음식 솜씨가 한몫 했다.

추위와 더위를 잊고 밤마다 모닥불을 피워 돌판에 오겹살을 구워주고 가마솥에 밥을 해주는 등 손님들의 환심을 샀음은 물론 전화번호부에 등재된 이름값 덕을 톡톡히 보며 PC통신과 전화 예약으로 주변 민박집들의 부러움을 사며 사시사철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외로움에 지쳐 적당히 세상과 담쌓겠다는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흔히 더 늦기 전에 장가들기 위해 남들처럼 서울로 유명산 회군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이사를 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개를 팔고 닭은 사람들을 불러 잡아먹었고 애지중지 주변 산자락을 헤매서 채취하여 담가둔 40여 가지 약술과 꼭 필요한 재산목록을 챙겼다. 짐을 거의 다 싸자 형 화물차가 오기로 했으니 집 앞 길가까지 50여 미터를 옮겨갈 사람만 있으면 된다. 이사 준비 완료.

"여보세요. 김규환 선배님이세요?"
"응. 누구?"
"저 소앵이라고 해요."
"뭐 소양이? 누구…."
"독문과 장소앵이라고요."
"아, 그래 연락 올 줄 알았지. 박은영이가 전화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왜?"
"응, 다른 게 아니고요 이번 주 토요일날 춘희랑 놀러 가려고요."
"좋을 대로 해. 오는 방법은 알지?"
"예."

토요일이면 내가 이사 나가는 날이다.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했지만 늙은 총각으로 살기 힘겨워 떠나는 길에 나간 집구석을 보러 오겠다는 전화가 오다니.

"아냐, 모레 서울로 이사를 가니까 다음 주에나 보자"라고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인생이 바뀔 뻔 했던 순간이었다.

내 꿍꿍이속은 허름한 곳이지만 선배가 2년간 정붙여 살았던 누추한 곳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보다는 '처녀뱃사공'이 한 명도 아닌 둘이나 온다니 야수의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그냥 오라고 한 것뿐이다. 뒷감당은 그 때 상황 봐서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이삿짐을 한참동안 나르고 있었다. '덤앤더머'라고 할까, '키다리와 난쟁이'라고 할까? 두 아가씨는 정반대로 생겼다. 키가 큰 소앵이는 늘씬하다. 한 때 학생회 활동을 같이 했던 이름에서부터 촌티를 풀풀 풍기는 춘희는 '땅콩'이라 불리는 골프선수 김미현보다 10cm나 작은 왜소함에 통통하기까지 했다.

그 마을에 들어가서 사귄 동네친구들과 가족 등 여러 명이 짐을 7할 정도 내갈 무렵 도착했는지라 집안은 포탄만 맞지 않았지 정말이지 폐허로 바뀌어 있었다. 전날 작별한답시고 술 한 잔 덜 마시고 친구들과 큰 짐이라도 내갔으면 이런 꼴은 보이지 않으련만….

바로 앞집이 종점이라 사람들이 내리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야 야 오랜만이다. 사실은 오늘 나 이사 나간다. 그래도 보고 싶어서 오라고 했어."
"괜찮아요. 청량리에서 청평까지 비둘기호 타고 버스로 갈아타니까 금방이네요. 호수가 환상이네요. 이렇게 멋진 줄 알았으면 진즉 와볼 걸."
"춘희도 잘 있었어? 얼마만이지?"
"선배님 안녕하세요."

서울 안암동에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은 안다. 소위 '개병대'라 불리는 군대보다 학번이 깡패였다는 사실을. 한 학번 차이인데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가며 아직도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3학년 때 그 모습 그대로 아닌가.

"몇 년 만이야?"
"10년 만이네요."

이사꾼들은 짐을 나르느라 바쁜데도 내가 살았던 뒷마당 놀이터를 보여주며 잠깐 대화를 나눴다. 잠시 산자락을 둘러보라는데 하늘같은 선배가 짐을 나르자 결국 두 노처녀도 거든다고 이 것 저 것을 나르니 놀러왔다가 졸지에 짐꾼이 되고 말았다.

이제 길이 좁아져 둘이 다니기에 벅차므로 대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궁금하던 것도 많았지만 마음은 바쁘다. 고향이 소앵이는 부산이고 춘희는 전라도라고 했다. 같은 학과 친구지만 이리 달라도 다르단 말인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둘은 나이가 두 살 차이나 난다.

섬광처럼 컴퓨터가 재빠르게 돌았다. '그래, 동향이라 춘희가 입맛도 맞을 거야. 오늘 춘희한테 이야기 해야지'가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요즘 뭐 하는데? 회사 다니냐?"
"공무원이에요. 시험 봐서 9급으로 들어갔어요."

이 사람이 나와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아내다. 변함없이 나를 지지한다. 올 가을에만 두번 국화 꽃을 줬는데 싱글벙글 좋아한다.
이 사람이 나와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아내다. 변함없이 나를 지지한다. 올 가을에만 두번 국화 꽃을 줬는데 싱글벙글 좋아한다. ⓒ 김규환
그 학벌에 9급이라니 다소 실망이었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아니다. 당시 아내도 나와 한살 차이라 어차피 혼기를 넘겼으니 짝을 찾게 된다는 뻔한 세상 섭리만 뚫어주고 폐물 취급만 하지 않는다면 쉬 넘어오고 말 것 아닌가. 게다가 도시로 나가 취직을 하겠다는 말은 이미 했던 터다.

"근데, 왜 시집은 안 가냐? 짝이 없는 거야 아니면 전혀 갈 생각이 없는 페미니스트야?"
"그건 아닌데 안 가려구요."
"야, 그런 게 어딨어? 만약 갈 거면 나에게 와라. 알았지?"
"……."

마당 앞에서 그것도 대낮에 수작(酬酌)을 부리고 있었지만 농반 반 진담 반이었다. 내가 뜬금없이 뱉은 말이 입력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어 마당 꽃밭에 그득 심어둔 노란 들국화를 한 움큼 꺾으며 또 다시 확인을 했다.

"얌마, 시집 갈 생각 있으면 나한테 오라고. 그러고 이 꽃 가져라. 그냥 올 봄에 심었는데 많이도 피었네."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동네 친구 충엽이가 와서 거들었다.

"아니 손 무안하게 왜 그래요. 얼른 받지 않고서. 야, 이리 줘봐. 자요."

못 이기는 척 손에 받아들었다.

딱히 여기서 어찌어찌 생겼다고 말하기는 후환이 두려워 밝히기는 그렇지만 아름다운 꽃과 보석을 무척 좋아하는 동물이 있다.

막상 건네주면 "저는 꽃 싫어해요"라며 냉정하게 뿌리치다가도 "여보세요! 세상을 살면서 그대는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삽니까? 싫은 일도 하는 게 사람이잖아요. 일단 보관하고 있으라니까요"라고 다그치며 "들고만 있으라"고만 하면 마지못해 받아 안지만 시큰둥한 척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꽃향기보다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된다는 이 분야 이치를 일찍이 깨달은 신동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3주 전에는 장가 한번 가보려고 서울 사는 처자에게 갖가지 야생화와 억새, 갈대를 멋들어지게 섞어 한 아름 안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직접 배달을 가서 퇴짜를 맞고 오질 않았던가.

경황도 없었지만 짐짓 들국화만 주섬주섬 꺾어주고 말았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점심 때 반주를 마시고 학원 강사인 키 큰 소앵이는 서둘러 서울로 떠났지만 춘희는 남았다. 남양주 매형 공장과 집에 짐을 나눠 내리고 다시 북쪽인 청평으로 충엽이 승용차를 타고 가서 저녁에 술을 한잔 마셨다.

석양이 붉게 물든 빈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친구는 제 집으로 가고 단둘이서 기차를 타고 오며 맥주를 마셨다. 저녁 시간이 되어 청량리시장에서 간단히 입가심을 하고는 먼저 간 소앵이를 기다리기 위해 또 한잔 나누고 나니 취기가 올라왔지만 한번 입에 담은 "너, 갈 생각이 있으면 내게 오라"는 말을 잊지 않고 반복했다.

밤 12시가 넘어 학원을 마치고 나온 소앵이와 함께 뒤풀이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서너 잔 마실 때 한 잔씩 받아 마시던 춘희는 알딸딸했던지 항의 한번 하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선배 비위를 맞추기 위해선지 인내심을 갖고 내내 함께 했다.

새벽 3시를 넘긴 시각까지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부어라 마셔라 취하니 아예 날을 새자는 말도 나왔지만 4시 무렵 수유리에서 춘희가 산다는 성산동까지 택시를 태워주고 형님네에 들어갔다. 낮에 같이 이삿짐을 날랐던 터라 누굴 만나고 온 지 안 형은 내가 한 여자와 같이 있었다니까 낌새를 알아보고는 키가 너무 작다며 극구 반대하는 거다.

식구가 연달아 늘어 이제 4명이 우리들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식구가 연달아 늘어 이제 4명이 우리들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 김규환
잔소리를 좀 듣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 잘 들어갔느냐고 전화를 하려고 했으나 핸드폰 건전지가 부족해 켰다하면 꺼지기를 반복했다. 잠깐 충전을 하여 간신히 입력된 번호를 찾아 공중전화까지 나가서 잘 잤느냐고 했지만 받질 않는다. 궁금해서 소앵이에게 전화를 해서 얹혀사는 언니네 전화번호를 알아내 오후 늦게 전화가 걸었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형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면 10년 만에 만난 사람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해요?"
"뭐?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실수라도 했냐? 손도 안 댔잖아. 근데 왜 그래?"
"결혼하자는 말을 아무에게나 하냐고요. 혹시 상습범?"
"뭔 소리야?"
"하도 황당해서 내가 핸드폰 전화까지 잃어버렸다니까요."

옳거니. 황당이나 당황은 순서만 다르다. 당황했다니 됐다 싶었다. 반복 학습효과가 이렇게 빨리 발휘될 줄이야. 분명 춘희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는 반증 아닌가. 직감한 나는 속으로 날아갈 듯 기뻤다. 드디어 장가를 갈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분명히 말했다.

"야, 정 그렇다면 지켜보면 될 거 아냐? 앞으로 15일 동안 헛된 행동 하지 않을 테니까 잘 봐봐."

콩깍지가 낀 걸까? 궁한지라 치마만 두를 가능성이 있으면 누구도 마다하지 않겠다던 그 때 여성관과 환경이 상황을 그토록 궁지로 몰고 갔으니 책임은 져야 한다. 총각 때는 웬만한 허물도 용서가 되지만 혼인빙자(?)라도 술김에 했다면 응당 죄과를 치러야 하는 법.

선배 회사에 취직하여 2주 째 다니고 있던 11월 15일 무렵 어느 날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기숙사에 뒤늦게 입사한 나에게 3학년 선배가 귀엽다고 '꼬맹이'라 불러 과히 유쾌하지 않았는데 내게 들국화를 받아들었던 여자 '꼬맹이'가 생일을 축하한다고 꽃 한 다발에 케이크를 사서 신사동 회사 근처까지 온 게 아닌가.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장인어른을 순대집에서 뵙고 만난 지 2달 만인 성탄절 전야에 살림을 합쳤다. 이제 해강이 솔강이가 다섯 살, 네 살이니 벌써 만 5년이 지났다. 알콩달콩 지지고 볶고 튕기며 사랑하고 실망하며 다시 아침과 저녁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으니 참으로 들국화가 맺어준 인연치고 소설 같지 아니한가.

어제 밭에 다녀오는 길에 서리와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오상고절 절개를 지킨 주황으로 단풍든 국화를 꺾어다 주니 "이렇게 예쁜 국화는 본 적이 없다"며 대단히 반긴다. 참 세상은 알 길이 없나보다. 언제 내가 춘희라는 촌뜨기-스스로 꼬맹이라 부르는 여성과 결혼을 상상이라도 했었던가.

덧붙이는 글 | 총각 신세를 면키 어렵거든 마음에 둔 사람에게 한번 시도해보시지요. 김규환 기자는 요즘 고향느낌(!)이 풀풀나는 어릴 적 아이(i)들의 고향 이야기를 담은 www.고향i.com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르면 이달 말께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 기사 원고료는 인터넷 고향신문에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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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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