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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아이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눈앞이 캄캄해지거나 숨이 콱 막힐 때가 있다. 소통의 아픔이랄까. 교단을 밟은 지도 꽤 오래 되어 이제 놀랄 만한 일이 없겠다 싶어도 사정은 전혀 딴판이다. 그래서 요즘은 건강도 챙길 겸 아이들과 대면하는 일을 하나의 연수 과정쯤으로 여기고 미리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곤 한다.

우리 반 지각과 결석을 도맡아 하는 두 아이가 열 시가 다 되도록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받지 않고 문자를 보내도 감감 무소식이어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전화를 해서 부모님께 사정을 말해주었다.

한 시간쯤 지나 3교시 수업을 하러 교무실을 나서다가 막 계단을 올라오는 두 아이와 마주쳤다. 우선 짧은 시간에 무슨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가볍게 야단을 친 다음 일단 수업을 받게 했는데 할말이 있는 듯 한 아이가 나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솔직히 섭섭해요. 왜 저희들한테만 야단쳐요? 저희들 잘못한 거 알아요. 하지만 다른 애들도 잘못하잖아요.”

이쯤해서 나는 심호흡을 해둘 필요를 느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지도 않지만 그럴수록 순식간에 화가 폭발할 가능성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출석부 갖다 놓고 얘기할까? 너희들이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결석한 것하고 다른 애들이 하루 이틀 지각한 것하고 어떻게 비교를 해? 사람이 잘못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반성할 줄은 알아야지. 어떻게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

그 정도에서 대화가 끝날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할 말이 남은 듯했다. 눈치를 채고 나는 슬그머니 내장에서 쓸개주머니를 떼어놓는다.

“얼마 전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수업 중에 선생님이 오셔서 저희들 데려 가시니까 담임선생님이 저희들만 미워하는 것 같다고요.”

“그래?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보자. 내가 너희들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욕하거나 미워한 적 있니? 선생님은 잘 모르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너희들은 알잖아.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아니면 아니라고 해봐.”

아이는 잠시 말을 잃고 있었다. 그래도 눈빛을 보아하니 제 담임에 대한 혐의를 다 거둔 것은 아닌 듯했다.

“선생님이 저희들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은 고마워요. 하지만 저희들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게 못한다는 말은 좀 그래요. 우리가 잘못하면 혼을 내시든지 하고 다른 아이들은 그대로 잘해주시면 되잖아요.”

아이들 생각이 이렇게 짧다. 하지만 생각이 짧은 것은 미숙한 것이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 아이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세한 설명이 제격이다.

“선생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야. 너희들 이제는 되었겠지 싶은데 불과 며칠 안 가서 엉뚱한 짓 하면 너 같으면 속이 뒤집어지지 않겠니? 그런 뒤집어진 감정으로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제대로 대하고, 잘해줄 수 있겠니?”

아이는 전의를 상실한 난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수긍의 눈빛. 그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내가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너 바보냐? 어떻게 고등학생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생각이 없냐?”

소통은 연습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런 연습을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 학교사회의 단면을 아이들이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는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하고 한 편의 시를 썼다. 생일을 맞이한 아이에게 선물할 생일 축하시다. 완성된 시를 보면 별 것이 아닌데도 재능이 부족한 나로서는 시를 쓸 때마다 막막한 기분이 든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내 자신이 미련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나는 왜 제자들에게 시를 선물하려는 것일까?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한 아이와 소통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지 싶다. 아직은 어리고 미숙하지만 작은 우주요, 고유한 가치를 지닌 한 생명과의 내밀한 만남 말이다. 소통, 그것은 내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누군가의 꿈이 되어주고 싶은…

만약 천국이 있다면
그곳의 계절은 가을일 거라고
가을의 바람, 가을의 햇살
가을의 아침과 저녁이 반복되는
영원한 가을일 거라고

영원한 십일월일 거라고
십일월 중에서도
네가 태어난 초여드레
그쯤일 거라고
그 무렵의 스산함일 거라고

그런 생각에 종종 빠질 만큼
가을을 좋아하지, 나는
가을에 태어난 사람,
세상에 처음 눈 뜬 그날이
가을인 사람도 좋아하지

나뭇잎을 스치는 갈바람 소리
영혼 어디에선가
그런 음(音)을 낼 수 있는
가을을 닮은 사람을 좋아하지, 나는
우리 연우처럼

사회 복지사가 되어
누군가의 꿈이 되어주고 싶은
다른 이의 천국이 되어주고 싶은
남의 가을이 되어주고 싶은
너, 연우처럼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태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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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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