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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개상, 홀테, 발동기를 이어 경운기가 탈곡을 하게 됨에 따라 70년 대 후반 녹색혁명을 주도했다. 지난 주 장성금곡영화마을 에서 촬영
돌, 개상, 홀테, 발동기를 이어 경운기가 탈곡을 하게 됨에 따라 70년 대 후반 녹색혁명을 주도했다. 지난 주 장성금곡영화마을 에서 촬영 ⓒ 김규환
경운기가 전남 화순군 북면 송단리, 방리 일대에 들어온 것은 1970년대 중후반이다. 전기와 텔레비전이 보급된 해가 내가 4학년 때인 78년이고 선풍기는 이듬해였다. 냉장고는 아직 선을 보이지 않았다.

논밭 갈이도 축력쟁기로 계속 해오다가 그 무렵 도시로 나가지 않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급속히 보급되었다. 동력경운기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소를 대신하여 짐을 나르는데 속도 혁명을 가져왔다.

경운기는 달구지를 대신하여 짐을 맘껏 실어 훨씬 빠른 속도로 운반하고 여름엔 보리타작을 하다가 모내기를 마치고 한참 쉬었다가 가을엔 자동탈곡기를 만나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논밭을 가는데도 부리는 사람만 지치지 않으면 하루 수십 마지기를 거뜬히 해치웠다.

동력(動力)이라고 해야 거대한 발동기에 벨트를 걸어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대단한 마력을 지녔다. 발동기 한번 설치하려면 한나절은 잡아야 하고 철거하거나 옮기는데도 온 동네 장정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수고로움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발동기는 설치 장소도 대단히 넓어 마당에까지는 오지 못했지만 경운기는 덩치가 크지 않아 조그만 공터나 논과 밭을 가리지 않고 산골짜기 언덕이나 높다란 두렁까지 맘대로 박차고 올라 말목 몇 개만 박으면 일을 척척해냈다. 앞바퀴는 무척 작지만 기괴하게 생겼다. 질컥이는 땅을 오르내리는데 요긴하게 제작되었다.

사시사철 농가에 필요한 작업을 하나도 빠트림 없이 하는 팔방미인이었지만 ‘대동산업’ 딱지가 붙은 경운기는 명성이나 쓰임새에 비해 이름은 걸맞지 않게 지어졌다. 경운(耕耘)은 논밭을 갈고 김을 맨다는 뜻이다. 경운기(耕耘機) 처지에선 일년 농사 전반을 아우르고도 논밭갈이 용도로 밖에 소용이 없다고 붙여졌으니 충분히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지 않을까.

트랙터에 대형 트레일러를 매달아 줘도 쓰임새는 경운기를 따라오지 못했다. 더욱 편리해진 콤바인도 오로지 한 가지 일만 할 줄 아는 멍청이 일꾼일 따름이다. 7, 80년대 농촌 들녘을 주름잡던 경운기는 억척스런 주인을 만나면 밤샘 작업도 거뜬히 해냈다. 초기 모델이라 부리기가 여타 동력기계보다 대개 주인 몸 상태에 의존하기 나름이다.

논을 척척 갈아주던 경운기가 사라질 운명을 맞고 있다. 기계가 노쇠하면 사면 되지만 뒤이은 이앙기나 트랙터, 콤바인을 이기지 못한다. 부릴 사람도 어느새 6, 70대를 넘기고 있다.
논을 척척 갈아주던 경운기가 사라질 운명을 맞고 있다. 기계가 노쇠하면 사면 되지만 뒤이은 이앙기나 트랙터, 콤바인을 이기지 못한다. 부릴 사람도 어느새 6, 70대를 넘기고 있다. ⓒ 김규환
농촌에 남은 사람들 중에 신흥갑부가 형성되는데도 결정적인 구실을 하기도 했다. 농기계를 구입하는데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가난을 면치 못하던 사람들이 부지런히 소처럼 묵묵히 논밭을 갈면 당시로도 수백만 원의 품삯을 받아줬다.

나아가 가을철엔 환금성이 좋은 수백 가마 벼로 곧바로 보답을 하니 굳이 자신 소유로 논밭을 사들이지 않아도 수매 때가 되면 실어 나르던 나락가마니가 마을에서 첫째로 꼽혀 10여년 후엔 그들에게 시골 전답이 거의 넘어가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경운기엔 짐칸이 있다. 싣기에 따라서는 3톤도 거뜬하다. 장축도 아니고 폭도 좁아 나무토막 몇 개 싣고 나면 여유가 없어 보일 것 같으면서도 솜씨를 부리면 무한정 올릴 수 있다. 대우를 달아주면 더 힘이 세져서 끙끙거리고 팍팍한 신작로를 ‘세월아 내월아’ 하며 하루 서너 차례 오가기 힘든 달구지와 비교되지 않았다.

다만 꾀돌이 경운기의 화려한 등장으로 집집마다 한두 마리는 길러 이태 동안 애써서 길들여 농사에 썼던 가보1호 소가 뒷전으로 물러난 것과 더 많은 일을 해냄에 따라 농사꾼을 도회지로 내보낸 역적 노릇을 한 측면은 여러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토론해봐야 할 문제다.

아, 어느새 경운기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도다. 3단으로 통통거리며 요란하게 들길을 질주하던 힘센 일꾼이 뒤따라온 신흥강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보다 더 서글픈 건 이제 농부 어깨 힘이 부치니 맘껏 부릴 힘이 없음이다.

우리네를 먹여 살렸던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에서 밀려났듯 늙다리가 되어 한 구석에 녹슬어가는 시대의 산물을 보고 있노라면 농사도 10년이면 끝장이라는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다. 누가 힘들여 농사를 지을까보냐.

모를 실어 나르던 경운기 소리 듣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모를 실어 나르던 경운기 소리 듣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요즘 인터넷고향신문 www.고향i.com 창간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달 말쯤 선보일 예정이다. 

다음 기사는 경운기와 자동탈곡기로 추수하는 장면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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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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