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월래스와 그로밋의 관계. 때론 친구처럼, 때론 주인-하인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월래스와 그로밋의 관계. 때론 친구처럼, 때론 주인-하인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60년대 이후 영국 영화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밀려 상당히 위축됐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물론 영국인들조차도 영국 영화에 열광하지 않게 됐으며, 영국적인 내용이 가득한 007 시리즈나 해리포터 같은 영화들마저 할리우드 상표를 붙였다. 최근에는 <노팅힐(1999)>이나 <러브 액츄얼리(2003)> 같은 코미디들만이 영국 영화 간판을 내걸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전체를 영국색으로 도배하고 있는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의 약진은 실로 놀랍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월래스'와 '그로밋'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아드만사의 닉 파크는 영국인들의 피부에 직접 와 닿는 영국적 소재들과 영국인들의 실제 생활상을 기발한 아이디어들과 함께 아기자기하게 포장해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웬즐리데일 치즈사는 이번에도 광고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웬즐리데일 홈페이지.
웬즐리데일 치즈사는 이번에도 광고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웬즐리데일 홈페이지.
월래스가 즐겨 먹는 '웬즐리데일'이라는 치즈는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셔 지방에서 주로 생산되는 전통 치즈다. 90년대에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웬즐리데일 치즈는 시리즈의 첫 번째 단편인 <화려한 외출(1989)>이 대성공하면서 재개했다. 때문인지 이번 장편 개봉 후에도 새 웬즐리데일 치즈가 나왔다.

이 치즈와 함께 나오는 크래커도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영국 내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이콥의 크림 크래커'와 똑같은 포장이다. 이 크래커는 1800년대에 생산되기 시작한 전통적인 영국 과자 중 하나로, 실제로 영국인들은 이 크래커를 먹을 때 잼이나 치즈를 즐겨 발라 먹는다.

월래스의 홍차를 마시는 습관도 두말 할 필요 없이 영국적인 문화다. 영국인들은 홍차에 설탕과 우유를 섞어 마시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 평균 5~6잔정도 마신다. 또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도 현실과 상당히 유사한데, 마치 영국의 소도시와 집안 모습을 세트로 옮겨 놓은 듯하다. 관객들은 영국의 전통적 일상생활이나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간접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더 강해진 영국적 문화콘텐츠

이번에 개봉한 장편 <월래스와 그로밋>은 예전의 세 단편들보다 훨씬 더 영국색이 짙어졌다. 귀족과 일반인들과의 관계와 사냥에 대한 찬반문제가 영화 전면에 등장한다. 시골에서 열리는 전통적인 영국식 채소경연대회와 전형적인 영국식 시골생활 및 사회구성은 영화의 전개를 위한 필수요소다.

마을을 위해 해충관리특공대를 만들어 활동하는 월래스와 그로밋. 그러나 토끼를 주로 잡는다.
마을을 위해 해충관리특공대를 만들어 활동하는 월래스와 그로밋. 그러나 토끼를 주로 잡는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영국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을 영화로 흡수한 부분. 영화에 등장하는 토끼는 무슨 식물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존재로 나온다. 실제 시골마을에 살며 정원을 가꾸는 취미를 가진 영국인들에게 영국 공원이나 야생 숲 여기저기에서 아무거나 먹어대는 토끼는 상당히 위협적이다. 영국 영화 <윔블던(2004>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화려했던 영국문화의 번성기를 추억하듯 전설과 탐정 소설 전개 방식을 섞어 스토리의 토대로 쓴 점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중성격의 공포를 묘사하는 고대 그리스의 '뤼케이온' 신화를 모태로 하고 있는 유럽의 늑대인간(were-wolf) 전설에 영국식 셜록 홈즈 탐정 소설 전개 방식을 연결시켰다. 이번 장편의 영어 원제는 '토끼인간의 저주(The curse of the were-rabbit)'다.

10월 1일자 <인디펜던트지>는 <월래스와 그로밋>의 심리 치료적 효과를 강조했다. 심리학자 브라이언 클리포드 교수는 "어렸을 때 상상했던 기발한 발명품들이 우리의 환상을 채워주며, 3차원적 형태를 띠고 있는 월래스와 그로밋이 우리를 현실로부터 자연스럽게 도피시켜 준다"며 "월래스와 그로밋은 일상생활에 지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고 해석했다.

영국적 전통에 대한 향수? 조롱?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영국색의 백미는 영국 귀족사회, 계급사회에 대한 조롱이다.

먼저 월래스와 그로밋의 관계설정을 보자. 발명가인 월래스와 그의 충실한 애완견 그로밋의 관계는 친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영국의 전통적 주인-하인 관계이기도 하다. 특히 월래스보다 그로밋이 똑똑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하인에게 의존하는 영국 귀족계급에 대한 일반인들의 감정을 반영한다.

월래스가 만들어낸 발명품들은 보통 아주 기발하지만 허술하다. 이 문제점을 고치는 것은 언제나 그로밋이다. 또한, 위험 상황에 처했을 때 해결사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주로 그로밋이다. 이런 영국적 사회계급에 대한 풍자는 다른 영화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영국 영화 <고스포드 파크(2001)>에도 멍청한 경감과 똑똑한 순경, 답답한 귀부인과 똑똑한 하녀가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의 영어 발음도 주의 깊게 들어볼 만하다. 북부 잉글랜드 억양을 가진 일반인인 월래스(피터 살리스)와는 다르게 귀족인 레이디 토팅톤(헬레나 본 카터)과 빅터 경(랄프 파인즈)은 귀족 억양(Posh accent)을 구사한다.

레이디 토팅톤과 빅터.
레이디 토팅톤과 빅터.
거대한 저택에서 사는 돈 많은 귀족 레이디 토팅톤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모자라는 구석이 있어 보이고, 사냥을 즐겨하는 빅터 경은 돈 때문에 레이디 토팅톤에게 접근하는 전형적인 악당이다. 순진한 월래스와 똑똑한 그로밋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인물들인 것이다. 지금도 영국에는 지역 사투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따른 억양이 존재한다. 영화는 영국적인 전통과 계급사회를 살짝 비틀면서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월래스와 그로밋, 세 마리 '토끼'를 잡다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가 담고 있는 이런 영국 문화콘텐츠들은 자연스럽게 영화의 내용에 녹아들어 해학과 친근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내용보다는 '월래스'와 '그로밋'이란 캐럭터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이 시리즈가 2차원의 평면적 애니메이션이나 선이 날카로운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3차원적이며 부드러운 클레이애니메이션(점토만화)이라는데 있다.

스톱모션 영화의 일종인 클레이애니메이션은 사람이 점토 인형에 조금씩 변형을 가해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고 이를 연결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1초의 움직임을 위해서는 24장이 있어야 하므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실제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므로 훨씬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영국의 유명 영화잡지 '엠파이어'는 <월래스와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에 별 5개 만점을 주었다.
영국의 유명 영화잡지 '엠파이어'는 <월래스와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에 별 5개 만점을 주었다.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에도 이런 입체적 질감이 잘 살아났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일반 영화의 인물보다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처리됐다.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심리 묘사를 위해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자주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또 <월래스와 그로밋>에는 항상 메시지가 등장한다. <화려한 외출(1989)>은 치즈 때문에 월래스가 달의 환경을 파괴(?)한다는 내용이 있고, <전자바지 소동(1993)>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펭귄에게 속은 월래스가 다이아몬드를 훔친다는 내용이며, <양털 도둑(1995)>에는 로봇 개가 인간을 위협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번 <거대토끼의 저주>에도 두 가지 메시지가 나오는데 첫 번째는 정원을 망가뜨리고 밭의 채소를 갉아 먹는 골칫거리인 토끼를 사냥해서 없애버릴 것인가, 아니면 환경보호와 동물사랑을 위해 그대로 둘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 따라 자연과 환경을 재단하는 것이 옳은지를 질문했던 노르웨이의 환경철학자 아른 네스의 고민과도 같다.

두 번째는 SF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과학만능주의 문제, 곧 과학윤리다. 영화에서 월래스는 과학을 이용하여 자연, 곧 토끼의 식성을 바꾸려는 야심찬 계획을 시행한다. 이런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경고는 이미 산업혁명이 한창이었던 1880년대에 영국의 여류 작가인 메리 셀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영국에서 최초로 나타났다. 이것 역시 어느 정도는 영국적인 셈이다.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는 자국의 문화콘텐츠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창조적 영화기법, 그리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메시지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단맛과 쓴맛 동시에 맛보고 있는 아드만사

▲ BBC 뉴스 인터넷판 10월 10일자 기사. 월래스와 그로밋 세트가 있는 건물에 화재가 났다는 내용.
'월래스와 그로밋'을 만들어 낸 영국의 아드만사는 <거대토끼의 저주>를 만들어낸 이후 단맛과 쓴맛을 동시에 맛보게 됐다. 아드만사는 이번 장편이 전미 박스 오피스 1위에 올랐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난 10월 10일, 브리스톨 시에 있던 회사 건물의 화재로 세트장을 모두 잃었다.

아드만사의 대변인인 아서 쉐리프는 "그동안 만들어낸 모든 것을 잃었다. 단 몇 시간 만에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또한 아드만사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데이브 스프록스턴은 "제일 아까운 것은 <월래스와 그로밋> 단편 3부작의 오리지널 세트가 모두 불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세트는 일본 전시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다"라고 비통해했다.

그러나, 정작 <월래스와 그로밋>의 제작자인 닉 파크는 의연한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우리 회사의 화재는 충격적이고 우리가 잃은 손실은 비극적인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비극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후문.

이런 악재 속에서도 이번 영화는 상당한 흥행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예전 단편들과 분위기가 비슷해서 식상하다는 일부의 냉소적 반응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영국 아카데미에서의 수상은 물론, 미국 아카데미의 오스카상을 계속 거머쥐었던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가 이번에는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