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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 광장에서 삭발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경주시장과 시의회 의장(위), 이들의 농성장 바로 옆에는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군산지역의 펼침막을 찍은 대형 걸개판이 설치돼 있다.(아래)
경주역 광장에서 삭발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경주시장과 시의회 의장(위), 이들의 농성장 바로 옆에는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군산지역의 펼침막을 찍은 대형 걸개판이 설치돼 있다.(아래) ⓒ 오마이뉴스 이주빈
지난 29일 밤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펼침막 하나가 30일 아침부터 경주 시내 곳곳에 내걸렸다.

'한번이라도 경상도 이겨봅시다', '경상도에 빼앗기고 후회말자'...

'군산의 실상을 보십시오'라는 제목이 달린 이 게시물에는 군산 지역에 걸려있는 펼침막 중 지역감정 내용을 담은 펼침막을 찍은 사진이 가득 담겨있었다. 군산은 방폐장 유치신청 지역중 유일한 전라도 지역 도시.

미워하면서 닮아간다 했던가. 이제 방폐장 유치 찬반투표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경쟁에서 절대 질 수 없다는 감정 대결로 변질되고 말았다.

"반대단체, 경주에 원자력발전소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

30일 오후 경주역 광장. 백상승 경주시장은 이종근 시의회 의장 등과 함께 삭발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백 시장의 농성장엔 각 단체와 시민들의 방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백 시장은 주민투표 하루 전인 11월 1일까지 단식농성을 할 계획이라고.

백 시장은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농성천막 바로 옆에 군산에서 내걸린 펼침막 문구 사진을 게시해 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린 찬성 80% 이상 해본 적이 없는데 저쪽(전라도)은 90% 찬성하지 않나"라며 "정부가 호남에 방폐장을 주기위해 주민수용성을 따지는 주민투표를 고안해냈다"고 주장했다.

군산시가 정부의 경주지원설의 근거로 선전하고 있는 신월성 원자력발전소 697억 지원 사실에 대해서 백 시장은 "2003년에 내려왔지만 아직까지 한 푼도 안썼다"고 해명했다. 그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산업자원부가 해명해줘야 하는데 아무 말도 않으니까 오해가 생기고 결국 저쪽(군산)이 이용하는 것 아닌가"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군산시에서는 정부가 방폐장 주민투표 발의 직전인 지난 달 29일 신월성 1, 2호기를 승인하고 원전주변지역 지원금을 푼 사실을 두고 '경주시민들의 반원전, 반방폐장 여론을 돌리기 위한 편파지원'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상황이다.

부재자 투표를 둘러싼 관권선거 시비와 관련 백 시장은 "거소자들이 대부분 기권하니까 부재자 투표라도 하라고 권유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책사업이 걸려있지 않으면 권유도 못한다"며 "정부가 법을 마련해 투표율을 어떻게든 올리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부정선거 운운하나"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백 시장은 "사람들이 '역사문화도시에 웬 방폐장이냐'고 하지만 그 사람들 대부분은 경주에 방폐장보다 더 위험한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방폐장과의 연관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높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방폐장 주민투표가 안전성 논쟁보다는 영호남 대결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은 유치반대 단체도 인정하고 있는 상태.

경주 핵폐기장반대 공동운동본부(공동본부) 이문희 사무국장은 "핵폐기장에 대한 찬반 양측의 생산적 토론은 온데간데 없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도시간 경쟁만이 남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경주 핵폐기장반대공동본부 관계자들도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생산적 논쟁은 사라지고 지역감정만 남았다"고 허탈해 했다.
경주 핵폐기장반대공동본부 관계자들도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생산적 논쟁은 사라지고 지역감정만 남았다"고 허탈해 했다. ⓒ 최완
공동본부는 "주민투표 진행과정에서 시와 공무원들이 깊숙이 개입했다"며 "이를 통해 나온 결과는 인정할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다. 또 "부정선거 사례를 취합해 시장과 공무원은 물론 선관위의 직무유기까지 검찰에 고발할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헌법소원도 할 계획"이라고 강경대응 방침을 밝히고 있다.

"선관위원 있는 부재자 투표소에 찬성유인물 버젓이"

공동본부가 시와 함께 선관위까지 문제 삼는 까닭은 감포읍사무소에 마련된 부재자 투표소에 찬성 측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

공동본부는 "선관위 직원들이 2층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법행위가 버젓이 행해지고 있었다"며 선관위를 의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선관위 관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소란한 틈을 이용해 누군가 찬성단체 유인물을 갔다가 놓은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공동본부는 "공무원들이 통장과 이장들까지 동원해 투표에 적극 개입하고 나서고 있다"며 관권 부정선거를 거듭 주장하고 있다.

증거도 적지 않다는 게 공동본부의 주장이다. C동 한 아파트에서는 우체통과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지점인 경비실에 임시투표함을 설치해 투표용지를 수거한 사실을 포착했다. H동에선 통장이 직접 공보물을 배송·수거한 사례도 접수했다.

아울러 동장이 통장 20여 명을 모아놓고 주민투표를 조직한 사례도 적발했으며 심지어 부재자투표소가 마련된 것을 주민들에게 숨기고 우편을 통한 투표(거소투표)를 독려했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모두 관권투표 의혹 사례들이다.

이문희 국장은 "전문가, 시민단체 등이 모여 부지조사 등을 제대로 한 다음 수용성 검토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 순서"라며 주민투표 절차상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끝내 영호남 감정다툼으로 변질되고만 방폐장 위치선정 주민투표. 군산과 경주에서는 근거 없는 주장과 각종 설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펼침막처럼 난무하고 있지만 정부는 '주민의 수용성'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다.

오는 11월 2일. 경주 군산 포항 영덕. 네 도시 중 한 곳에서 가장 높은 유치찬성율이 나와 유치지역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든 이 결과를 쉽게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단체의 논리는 어딜 가나 똑같았지만 찬성단체의 논리는 각 지역마다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정부가 방폐장 유치에 따른 경제성만 부각시키며 주민투표를 통해 찬성이 높은 지역엔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주겠다고 부추겼기 때문이다.

주민투표는 끝나겠지만 다시 곪아버린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쉽게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경제성에 짓눌려 잠시 숨길 수 있었던 안전성의 문제는 반대단체들의 주장처럼 '새로운 싸움의 고리'로 다시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그때 정부는 또 어떤 대책을 내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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