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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신선이 산다는 곳에 갈 수 있을까.
영실, 신선이 산다는 곳에 갈 수 있을까. ⓒ 김동식
산은 산이라 했던가. 산은 인간의 지배를 거부하는 대신 지친 영혼과 동행하는 길벗이다. 그래서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산맥의 최고봉에 어렵게 올라가서 보람의 깃발을 꽂았다면 그냥 내려오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두고 부끄럽게도 산을 정복한 것처럼 만용을 부리는 것은 곤란하다.

가슴 저미는 영실계곡의 단풍
가슴 저미는 영실계곡의 단풍 ⓒ 김동식
영실계곡은 온통 가을 빛깔이다

영실 산장에는 가을산을 오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산행 준비가 잘 된 등산객들과 복장상태부터 불량한 초보자들까지 뒤섞인 산장 앞 빈터는 닷새마다 돌아오는 5일장 보다 더 혼잡하다. 그래도 모두가 즐거운 표정들이다.

영실단풍의 세계로 가려면 영실숲을 지나야 한다. 가을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소나무가 울창하게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2001년에 소중한 명함 하나를 받았다. 생명의숲가꾸기국민운동과 유한킴벌리가 마련하고 산림청이 후원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하여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것이다.

제법 찬바람이 살 속을 파고들지만 그렇게 춥지가 않다. 숲이 베푸는 은혜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나서야 그 고마움을 알 정도로 우리의 신경은 정말 무뎌진 것 같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참 좋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일부러 피해 가는 사람도 있다. 따뜻한 마음이 곱기도 하다.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은 단풍계곡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은 단풍계곡 ⓒ 김동식
영실 계곡에는 온통 가을 빛깔이다. 흐르는 개울에도 늦가을의 정취가 떠 있다. 바위틈에 모여 쉬고 있는 단풍들도 계절의 변화에 익숙해 보인다. 투명한 물빛에 나무들이 먼저 취해 잠겨 있다. 개울에 비친 단풍나무에 아무나 손을 뻗어 자연의 신경세포를 건드려도 오늘은 용서해 줄 것 같다.

계곡을 지나면 약간의 칼로리 섭취가 필요하다. 산행길이 가파른 곡선을 그릴 때부터 숨이 차고 평소의 운동량을 평가받는다. 고갯마루를 힘겹게 올라간다고 부담을 안을 것까지는 없다. 숨을 고르면서 계곡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단풍에 마음을 싣다보면 납덩이를 진 몸에도 여유가 붙기 시작한다.

안내판에는 병풍바위까지 1.5km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몇 km가 무엇이 중요하랴. 산에서는 목표를 두지 말아야 한다. 산행은 경기가 아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거리 설정이야말로 무모한 일이다. 괜히 재촉하는 것 같아 영 거슬린다. 시간까지 표기한 안내지도는 친절의 과잉이다. 1시간 30분만에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가라고 한다.

우리 마음 속까지 타들어 가고 있네.
우리 마음 속까지 타들어 가고 있네. ⓒ 김동식
아! 능선과 계곡이 불타고 있다

경사가 가파르다. 돌계단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데도 땀이 이마를 가른다. 해발 1400m. 여기서 멈추라고 한다. 구름도 쉬어가는 곳에 우리 인간이 앞질러 갈 수야 없다. 가을산의 매력에 흠뻑 빠질 준비가 됐는지 자기 점검이 필요한 순간이다.

영실의 가을이 불타고 있다.
영실의 가을이 불타고 있다. ⓒ 김동식
아! 능선과 계곡이 불타고 있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 속까지 불이 붙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먼저 받아들인 붉은 나뭇가지에 우리의 마음도 다가가 걸린다. 겸허한 수용. 우리의 욕심을 받아주는 단풍나무, 굴참나무, 서어나무가 손을 내민다. 눈 시리도록 고맙다. 한나절을 매달려도 그대로 품어 줄 것 같다.

만산홍엽의 수식어가 낯설기만 하다. 우리 자신이 산 속에 머물고 심장이 붉게 타들어 간다면 그것으로 성공이다. 자연과 잠시나마 한 몸이 됐다면 산과 계곡을 애써 관망의 대상으로만 색칠하는 것은 왠지 서운하다.

단풍이 고운 병풍바위
단풍이 고운 병풍바위 ⓒ 김동식

가을 한라산의 최고의 선경, 영실기암
가을 한라산의 최고의 선경, 영실기암 ⓒ 김동식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음에 묻은 때를 씻고자 한다면 작은 도시 하나를 다 두르고도 남을 병풍바위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는 평화이다. 호흡이 불규칙했던 순간도 병풍바위 속으로 흡수되고, 고달픔의 흔적도 절벽 속으로 사라진다. 구비구비 넘어가는 곳마다 단풍옷을 갈아 입은 벼랑이 깎이고 휘어지고 난리가 났다. 이 정도면 만물을 지배하는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특혜가 아닌가.

이곳 한라산 허리에는 화산의 씨앗인 제주의 오름들이 저마다의 몸짓으로 서 있다. 여기 영실은 백록담의 서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불래오름, 어슬렁오름, 망체오름, 삼형제오름, 붉은오름, 천아오름이 제 자리를 지키며 영겁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수만 년 전 산천초목을 품더니 언제부턴가 날아다니는 새, 뛰어다니는 동물, 그리고 생각하는 인간을 품에 안았다.

어느 규수의 치마 저고리도 이토록 고왔을까?
어느 규수의 치마 저고리도 이토록 고왔을까? ⓒ 김동식
영실의 가을은 가까운 곳에 있다

병풍바위를 발아래 두고 단풍에 취하고, 대자연의 신비에 몸을 떠는 동안 해발 1600고지까지 올라왔다. 흐렸다가 갰다가, 돌풍이 불다가 산들바람으로 바뀌고, 이내 푸른 하늘이 열리는 자연의 활기찬 동작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아뿔사! 뭔가 빠뜨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병풍바위 건너편에 펼쳐진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오백나한'을 닮았다고 하는 영실기암의 선경을 왜 지나쳤을까? 가장 낮은 자세로, 눈앞에 펼쳐진 단풍의 추임새에 홀딱 빠졌던 것이 틀림없다.

영실의 가을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가까운 곳에서 코끝까지 다가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을 줄이야. 무엇이 아쉬우랴. 벌써 형형색색의 비단을 두른 단풍나무에 마음을 던져 그네 타는 춘향이가 되고 만 것을.

아! 저기 백록담이 보인다.
아! 저기 백록담이 보인다. ⓒ 김동식
병풍바위 능선에서 빠져 나오려면 비좁은 구상나무 숲을 통과해야 한다. 이 숲길을 빠져나오면 활주로처럼 '선작지왓'이 펼쳐지고,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다.

아! 저기 한라산의 심장부, 백록담이 보인다. 구름을 걷어 내고 위용을 드러내는 자연의 속살이 저리도 장엄했던가. 마지막 화산이 대폭발하던 2만5000년 전에는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로 만산홍엽이 되지 않았을까?

가을 한라산의 최고의 선경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영실단풍의 절정은 10월 25일부터 11월 5일까지이다. 이 기간에 산행을 떠난다면 몸도 마음도 온통 붉게 물드는 추억여행이 될 것이다.

흰구름 걷히니 자연의 속살이 장엄하다.
흰구름 걷히니 자연의 속살이 장엄하다. ⓒ 김동식


 

덧붙이는 글 | 영실기암은 서귀포시에 위치해 있는 한라산국립공원이다.

<찾아가는 길> 
제주시나 서귀포시에서 영실코스로 가려면 지방도 99번도로(1100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제주시에서는 천왕사 입구-어리목-1100고지휴게소-영실입구-영실매표소로 가면 되고, 서귀포시에서는 중문-탐라대사거리-서귀포자연휴양림-영실입구-영실매표소로 찾아가면 된다.

<주변명소> 
어리목, 존자암지, 서귀포자연휴양림, 거린사슴전망대, 대유수렵장, 중문관광단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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