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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22일 저녁, 바다 낚시를 다녀와서 쉬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막내야! 내일 아침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나락(벼)을 널어 말려야 하니 집으로 오너라.”

아내는 내가 전화를 받고 있는 동안 시장을 향합니다. 아내의 시장 보따리에는 달걀 한 판, 오징어와 조기, 다시마를 비롯해서 각종 반찬과 과자가 들어 있습니다. 아내는 비닐봉지에 보따리에서 꺼낸 것들과 집에서 무친 나물을 챙겨서 따로따로 쌉니다.

집에 도착하니 마당 가득히 청색 포장을 덮어놓았는데 아직도 이슬이 깨지 않아 축축합니다. 올해 소출이 많이 났는지 물으니, 어머니는 옛이야기를 꺼냅니다.

“소출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옛날에 너희 할머니 돌아가신 해에 나라에서 ‘소출이 많은 통일벼를 심어라’고 얼마나 야단을 쳤니? 농민들은 밥맛이 없다고 몰래 ‘아끼바리’였던가. 하여튼 일반 볍씨를 뿌렸는데, 그때 면서기가 와서 묘판을 엎어 버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우리도 통일벼를 심었지. 너도 공무원이지만 그때 그 야속함이야 말할 수도 없었단다.

할머니 빈소를 아래채에 차리고 상을 치르는데, 삭망(보름과 초하룻날)에는 곡을 하고 제를 지냈던 것을 너도 기억하지? 땅딸막한 통일벼가 소출이 많았던 것은 맞지만 그때 밥맛이 얼마나 없던지, 차라리 보리밥보다 못해서 네 작은아버지들과 아버지는 제삿밥을 먹고 나면 끌끌 혀만 찼단다. 지금에야 그리 하라고 해도 아무도 할 사람도 없겠지만…”

우리 집 마당의 절반은 시멘트 포장을 하였지만 나머지는 잔디를 심어놓아 벼를 말리기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 앞의 포장된 도로보다 집에서 말리는 편이 벼를 옮기는 일손을 덜 수 있어 집 마당을 이용하는 편입니다.

아들과 나는 포장을 마당 전체에 고루 펼칩니다. 그리고 각 포장 위에 벼를 일정한 두께로 퍼 나릅니다. 아들과 나는 양말을 벗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들에게 시범을 보이며 두 발을 재게 움직이며 골을 짓습니다. 아들도 신이 나서 따라하지만 아무래도 깊이가 모자랍니다.

“이렇게 골을 지어야 표면적이 넓어져서 햇볕을 많이 받고 또 골 사이로 바람이 통해서 벼가 제대로 잘 마른단다.”

▲ 아들과 맨발로 골을 짓다
ⓒ 한성수
그런데 신이 나서 열심히 발을 놀리던 아들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아들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 보니 동그란 곤충의 대가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아버지, 이게 뭐예요”
“너는 뭐로 보이느냐?”

아들은 쪼그리고 앉아 유심히 그것을 살핍니다.

“메뚜기란다. 엊그제는 네 큰아버지들이 타작을 하고 나락포대를 마당에 널자 살아있는 메뚜기가 얼마나 많았던지 그 걸 잡아서 술안주를 해 먹었단다.”

▲ 이틀을 벼 무더기에서 견딘 살아있는 메뚜기
ⓒ 한성수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시 ‘메뚜기 사랑가’라는 노래를 가락을 넣어 불러 줍니다.

“♫~♩호옹산(紅山)도 부울거(붉어)지고 처엉산(靑山)도 부울거(붉어) 가고
이~내 등짝도 부울거(붉어) 간다. ♩~♬안고 가~자, 자고 가~자, 사~랑 사~랑 내 사랑아!”

귀를 쫑긋 세우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이맘때쯤에는 온 산에 단풍이 들어 붉게 변한단 말이야. 그런데 메뚜기란 놈들의 등도 붉어지는데, 그것은 메뚜기의 생명이 다했다는 의미란다. 그런데 가끔 암놈과 수놈이 붙어 있는 놈들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메뚜기를 잡으면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안고 가자, 자고 가자’며 처량하게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야.”

이 노래는 어머니가 젊었을 때 동네사람에게 들었는데,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며 아쉬워 하십니다. 벼에는 메뚜기, 여치를 비롯하여 개구리와 곤충의 애벌레는 물론이고 심지어 도마뱀, 지네, 사마귀까지 작은 동물들의 사체가 줄줄이 나옵니다. 아들은 벼가 살갗을 찔러 아프던 참에 그 사체를 밟을까 겁이 나는지 서둘러 양말과 신발을 신고는 이제 골을 짓는 것도 내켜하지 않습니다.

▲ 벼에서 나온 동물들의 사체(도마뱀, 애벌레, 메뚜기, 지네, 사마귀)
ⓒ 한성수
10년 전부터 메뚜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올해는 유달리 메뚜기는 물론이고 다른 작은 동물들의 사체가 많습니다. 지난해에는 동네어귀에서 반딧불이를 보았는데 마침내 우리의 논이 되살아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집은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올해 우리 동네의 다른 농가처럼 두 번씩이나 농약을 쳤다고 합니다.

차를 타고 동네를 지나는데 추수를 마친 빈 논에 앉았던 철새가 날아오릅니다. 두루미 종류로 보이는데, 도회지와 가까운 우리 마을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새입니다. 그동안 메뚜기를 비롯한 곤충들의 내성이 강해져서인지, 농약 및 비료의 독성을 완화시켜 환경친화적으로 개량한 것이 원인인지, 정말로 논이 살아난 것인지 농사에 문외한인 나는 모르겠습니다.

▲ 추수가 끝난 논에서 날아오르는 철새
ⓒ 한성수
그러나 벼논에 메뚜기와 곤충이 가득하고 철새가 다시 찾는 농촌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내는 어머니가 주신 돔부콩(덩굴강남콩)을 넣어 햅쌀로 밥을 지었습니다. 형님들의 도움이 컸겠으나 구순에 가까운 어머니의 노고가 곁들어져서 자르르 윤기가 나며 구수한 밥 냄새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 햅쌀로 지은 밥
ⓒ 한성수

덧붙이는 글 | 어머니는 올해 여든일곱이십니다. 세분 형님들이 농사를 짓는 셈이지만 어머니는 마음을 보태십니다. 일손이 부족하니 자연 농약도 칩니다. 그런 논이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쌀시장 개방', '추곡수매 폐지, 공공비축제 도입'으로 지금 농촌이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도 도시 소비자들이 우리 쌀을 애용해 준다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질 좋은 우리쌀이 시장에서 제 값을 받을 수 있다면 저렇게 도청 앞에 쌀가마니를 쌓아 놓고 '추곡수매 부활'을 목이 터져라 울부짖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 글이 소비자들이 '생명이 살아있는 신토불이 우리쌀'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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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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