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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의 각기 다른 초상화. 그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대조적이다. 난징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전체 윤곽은 못생긴 주원장의 얼굴 형상이라고 한다.
주원장의 각기 다른 초상화. 그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대조적이다. 난징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전체 윤곽은 못생긴 주원장의 얼굴 형상이라고 한다. ⓒ 김대오
최근 베이징커지(北京科技)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을 뽑았다.

홍콩 도시 대학의 심리학자 위에샤오동(嶽曉東) 교수는 주원장이 심각한 심리 장애와 인격분열의 정신병 증세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어릴 적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심한 의심과 방어기제로서의 잔인한 폭력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1368년 10월 21일 안훼이(安徽)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중팔(重八)이었으며 17살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절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던 주원장에게 가장 힘든 일이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난 후 주원장은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좋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도록 명령했다고 하니 이는 사천왕상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주원장이 승려로 일하던 시절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가 청소하기 힘들어서 자신이 황제가 난 후에는 사천왕상의 한 발을 모두 들게 했다고 한다. 사진은 베이징 근교의 홍루어쓰의 사천왕상이다.
주원장이 승려로 일하던 시절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가 청소하기 힘들어서 자신이 황제가 난 후에는 사천왕상의 한 발을 모두 들게 했다고 한다. 사진은 베이징 근교의 홍루어쓰의 사천왕상이다. ⓒ 김대오
25살에 홍건적의 두목 곽자흥(郭子興)의 군대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으며 무수한 전투를 치르며 세력을 키워 나간 주원장은 16년간의 전쟁 끝에 1368년 난징(南京)에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등극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서민이 황제가 된 사례로는 한고조 유방에 이어 두번째인 빈농 출신 주원장의 황제 등극에 대해 농민봉기에 의한 역사적 필연이라고 낮게 평가하기도 하고 농민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반원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주원장에게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황제가 된 후 주원장에게 슬슬 일종의 피해망상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신과 함께 나라를 세웠던 개국 공신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재상 호유용(胡惟庸) 등 1만5천여 명을 반역죄로 숙청하고 자신의 출신과 못생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문자의 옥'으로 또 많은 지식인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문자의 옥'이란 주원장이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광(光)',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을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한 것을 말한다.

한 선비는 "빛이 가득한 천하에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위해 법칙을 만들도다(光天之下,天生聖人,爲世作則)"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대머리의 '광(光)', 스님의 '생(生)', 도적을 나타내는 '칙(則)'이 함께 있었으니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시 관료들은 매일 집을 나서며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살아서 집에 돌아가면 껴안고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할 정도였다고 한다.

주원장은 또 <대명률>(大明律)을 제정하여 폐지되었던 잔혹한 형벌을 부활시켰는데 반역죄의 경우 주범이든 동조자든 일률적으로 팔다리, 어깨, 가슴 등을 차례로 잘라 능지처참했으며 만 16세 이상의 모든 가족까지 멸하는 족주(族誅, 가문 몰살)에 처했다. 또 60량 이상을 횡령한 관리에 대해서는 사형한 후 껍질을 벗긴 후 군중들에게 게시하기도 하였다.

주원장의 히스테리칼 한 공포정치는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들에게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즉 미천한 출생에서 시작해 최고의 지위인 황제에 오르면서 자신의 권력과 부귀를 보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정신분열증세로 나타난 것이다.

주원장은 왕위를 물려주려던 아들이 죽자 결국 손자인 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러자 네 번째 아들이었던 주체(朱棣, 영락제)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조카의 권좌를 찬탈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연출되고 만다.

결국 황제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늘 부메랑이 되어 황제에게 되돌아간다. 주원장은 자신이 평생 범한 과오 때문에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염려하여 철저한 보안 속에 자신의 묘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주원장의 묘인 효릉(孝陵)의 묘도는 발굴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주원장에 대한 두 장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인자하고 덕 있어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추하고 못생긴 형상이다. 주원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농민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명왕조의 기반을 다졌다는 긍정적 평가와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일삼는 정신분열증세의 폭군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차이나]는 그날 그날의 중국 근현대 소사(小史)를 전하며 중국 역사 속의 오늘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국정넷포터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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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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