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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바위 북면 앞에서 스님 한 분이 다른 스님에게 부처바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부처바위 북면 앞에서 스님 한 분이 다른 스님에게 부처바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추연만
“거대한 바위 4면에 여래상, 보살상, 탑 등 30여 조각을 새겨 사방불정토(四方佛淨土)를 나타냈습니다. 바위더미에 부처님 나라를 만든 셈입니다. 흔히 부처바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새겨진 9층탑은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본뜬 것입니다.”

스님 한 분이 부처바위를 찾은 다른 스님에게 이 같은 설명을 곁들이며 안내를 해줬다. 처음 온 듯한 스님은 이내 두 손을 모으고 부처바위 앞에서 목례를 반복했다. 지난 19일 오후, 경주 남산의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일명 '부처바위')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띈 모습.

두 달 전에 비해 부처바위 주위환경은 한 결 깔끔해졌고 바위의 돋을새김 조각들도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경주시는 지난 8월부터 바위청소와 철책 교체 등 대대적인 보존정비에 들어간 끝에 이 달 안에 마무리를 할 예정이다.

높이 10m, 너비 6m인 부처바위 북쪽 암벽에는 웅장하게 솟은 2기의 탑 사이 암벽 중앙에 여래불상이 앉아있다. 불상 머리위에는 화려한 천개가 떠 있으며 동탑 위에는 비천상이 날고 있다. 그리고 쌍탑 아래는 암수 사자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데, 참 재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탑의 암사자는 입을 벌렸고 서탑 수사자는 입을 다물었다. 음양의 조화일까? 아니면 열린 세계(극락)와 닫힌 세계(지옥)를 뜻하는 걸까?

부처바위에 대해 문화해설사는 “금강역사가 불국정토를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하듯 사자도 성스런 짐승이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암사자는 왼발을 들고 수사자는 오른발을 든 채, 싸우려는 자세를 하고 있으나 왠지 무서운 모습은 아니다. 사자꼬리가 세 갈래로 휘날리는 것도 퍽 특이하다.

9층탑과 7층탑
9층탑과 7층탑 ⓒ 추연만

9층탑 밑 암사자(왼쪽)와 7층탑 수사자 조각
9층탑 밑 암사자(왼쪽)와 7층탑 수사자 조각 ⓒ 추연만
암석 절벽에 이런 솜씨를 나타낸 신라인의 지혜에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특히 동・서 쌍탑은 2중 기단 위에 각각 9층과 7층 기와집 모양으로 돋을새김 된 장엄한 모양을 보여준다. 각 층마다 열린 창문과 닫힌 창문을 새겼고 추녀 끝에는 풍경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호화로운 여러 장식이 꽂혀있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천연바위에 얇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했지만 마치 실물사진을 보는 듯 생생한 탑 모양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석탑은 신라시대 만들어진 수많은 목탑의 원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황룡사 9층 목탑 모형도 이 부처바위 쌍탑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물론 돋을새김 기법 때문에 입체성을 증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의 원형을 밝히는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라인들은 왜 이 바위에 불상과 9층탑을 새겼을까? 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 시대부터 우리민족은 큰 바위에 영험한 존재가 있다고 믿어 왔다. 상사바위, 칠성바위 등으로 불리는 바위신앙이 그것이다. 부처바위 인근에는 성기바위, 옥룡암으로 불리는 토속신앙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부처바위
부처바위 ⓒ 추연만
신라불교는 대체적으로 민속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전파됐다. 이에 평생 동안 경주 남산을 연구한 고 윤경렬 선생은 “바위신앙 위에 불교가 들어와서 부처바위가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부처님이 바위에 숨어계시다’는 이러한 믿음은 우리 겨레의 특수한 믿음의 사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부처바위는 동서남북 4면에 30여개의 불교조각을 새겨져 있다. 사방불정토(四方佛淨土)를 나타낸다고 한다. 부처님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각기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 알맞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부처바위 남쪽 면, 채색된 부처님과 입상 여래불의 조형미

부처바위 남쪽 전경.
부처바위 남쪽 전경. ⓒ 추연만
부처바위의 다른 면들은 모두 얕은 돋을새김이지만 이 남면은 부조와 환조가 어우러지고 3층석탑과 석등 받침돌이 함께 하니 더욱 정겹다. 맨 앞의 낮은 바위에는 탑을 향해 가슴에 손을 모은 스님상이 있고 바로 옆에는 석등을 세웠던 자리가 보인다. 왼쪽 뒤로하여 풍만하지만 심하게 파손된 불상이 서있다.

두광과 얼굴은 없어졌지만 이 부처님의 얼굴은 틀림없이 보름 달덩이 같을 것이다. 왼쪽 손이 배를 잡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래서 예로부터 안산불(安産佛)로 불리어 후손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토속신앙과 불교의 조화로운 흔적이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가장 넓은 바위에는 인공으로 채색된 흔적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 협시보살이 몸을 본존으로 기대려는 모습의 천진함 모습도 있다.

동쪽 면, 장엄하고도 화려한 극락세계 모습

부처바위 동쪽 면
부처바위 동쪽 면 ⓒ 추연만
동쪽 면은 부처바위에서 가장 넓은 면으로 그야말로 불국토를 느끼기에 충분한 장엄하고도 화려한 모습이다. 꽃쟁반을 들고 꽃을 뿌리거나 합장하며 하늘에서 내려와 솟구치는 모습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동남쪽 바위에는 두 그루 나무 아래의 스님상과 부처나라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도 있다.

서쪽 면, 능수버들 아래 여래부처가 연꽃 위에 앉아

부처바위 서쪽 면
부처바위 서쪽 면 ⓒ 추연만
부처바위에서 가장 좁은 면으로 능수버들과 대나무 사이 연화대에 앉아 있는 부처와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눈매와 꼭 다문 입은 근엄한 표정을 베어나게 한다. 이 번 보수공사 기간에 땅에 묻혀있던 조각상의 일부가 발견됨으로써 앞으로 추가 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부처바위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문화재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7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한 오오사까란 일본인이 부처바위 터에서 '신인사(神印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부처바위는 신인종에 속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신인종을 창시한 신라 선덕여왕 시절의 명랑법사와 연관시켜 부처바위 연대를 7세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황룡사 9층 탑과 부처바위는 제작연도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높이 80m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12년에 세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문화재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황룡사 9층 목탑이 서 있었던 자리에서  남산의 부처바위 쪽을 바라보며 촬영. 사진에 보이는 초석은 황룡사탑에  사용된 65개 초석 가운데 가장 중심부에 사용된 '심초석'으로 무게가 30톤에 이른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서 있었던 자리에서 남산의 부처바위 쪽을 바라보며 촬영. 사진에 보이는 초석은 황룡사탑에 사용된 65개 초석 가운데 가장 중심부에 사용된 '심초석'으로 무게가 30톤에 이른다. ⓒ 추연만

덧붙이는 글 | '부처바위와 황룡사 9층탑'에 대해 후속 기사를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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